나에게 인조반정을 기억나게 해준 책 고교때 읽은 책이다.
광해군의 공과 과가 있다면 공은 계승발전시키며 과는 보완하여야 하는데치적으로 평가받는 외교까지 역주행해 전국토가 유린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국왕이 굴욕당하는 참패는 오늘날의 외교에 시사하는바 크다.
집근처에 이에 관련된 유적이 있다하여 찾아감.
학교샘은 왜 학교근처에 저런게 있다는 걸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쿠데타로 용이 되기전 로얄날백수이무기시절 아지트.
별서 別墅별장+농사짓는 땅,밭
1623년 여기서 장단부사 이서가 늦어 쿠데타군이 안절부절하였다 하여 연서 延曙 라는 지명이 생겼다한다.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iulRn-hLQ2BF8y9gbvoXNNMxttSBoR_oER_Ku1vJzu4wp6F2CAbqTeGf2dORC3OXXSPv0kyW1cUaYW87pcxb-cymANJenFRhQNdbsvX73VPyGemmCYcwG3wyEsupw-YyIWx2Ti/w640-h480/DSC01918.JPG)
창의문을 열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간다.👉https://dankunjosun.blogspot.com/2020/01/blog-post_20.html
이책의 이야기로 보면 이괄이 출중한 무관이었고 김유가 쿠데타 캪짱이었는데 문관이라 소심하고 꼼꼼하여 일이 더뎌지고 당일 거사일에도 자포자기하는등 우왕자왕하여 행동개시 시점이 늦어져 초조해지자 이괄이 나서 군기를 잡고 늦게온 김유에게 자존심의 상처를 주자 나중에 논공행상에서 이괄이 찬밥신세가 되어 이괄의 난(1624년)이 일어나 안산에서 격전을 치뤘다한다.
이때 인조는 공주로 피난가는 창피를 당하고 병자호란(1636년)때는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하는 치욕을 맛본다.
덕*말에 의하면 고위층일수록 소심하다는데..
문무관 갈등은 사육신심문과정에도 신중론을 비판한 무관유응부이야기에도 나온다.
언제가 뉴스에서 이곳이 방치되어 어린이 놀이터가 되었다고 나온걸 본적있는데 지금은 잠겨져있다.
인조반정 쿠데타가 왜 안좋은가 ?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나?
광해군은 1641년까지 살았으니 제주도 유배지에서 나라가 불타는 것을 보았을것이고 7월1일 내리는 광해우光海雨를 쓸쓸히 보았을 것이며 재위15년,유배18년 영광보다 고난이 긴 시절을 버티며 복권을 꿈꾸었다한다.
대부분의 왕족이 유배당하면 화병으로 얼마를 못버티고 죽는데 18년을 버티었다는 것은 복권의 집년이 강하고 유배시절 존칭을 듣지 못해도 노하지 않았다하니 그의 그릇됨을 알수 있다.
쿠데타이후 논공행상에서 지금되는 토지문제가 나중 세습되면서 과거합격후 지급되는 토지에 부족문제가 제기되자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배운격이 난다.
사회의 부富체계가 교란되기 때문이다.
저 교회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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