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 닿는 글귀
우리나라 국보의 80%가 불교미술인데 사실 대중에게 쉽게 알기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상식이나 교육이 부재한 상태에서 뜻깊은 전시이다.
<금강경변상도 목판, 조선,1679>, 각수승 연희는 울산 운흥사에서 약 20년간 15 종류의 불교 경전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문인 정시한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경천 수천 매를 11년째 새기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 순간을수행의 일환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김용옥 샘의 <스무살, 반야심경에 빠지다/ 통나무/ 2019>에서는 일제강점기 왜색불교가 조선불교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를 여럿 들지만 아마도 이런 분들의 마음가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482년 경상도 다밀지 정수사에 조성한 아미타불상
고려 후기 조각 전통에 명나라 양식을 도입한 작품
목조비로자나목조좌상(조선 1622)
광해군 비인 장렬왕후(章烈왕후?폐비 류 씨를 이루는 듯 하나 검색을 통해 알 수 없다.)
의 주문으로 당대 최고 실력자인 현진,응원, 수연, 법령 등 17인의 장인이 모여
제작한 불상 11구 중 하나
공교롭게도 다음해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사망한다.
1454년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성한 불화(수륙화)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소장품
일본 목조아미타여래 입상
(가마쿠라시대)
1493년부터 1628년 사이에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작은 불상
과거에 방송스태프 막내 하다가
배우도 되고, 피디, 제작사 기획도 하게 되었다는
드문 이야기가 생각난다.
영취사 영산화상도(조선, 1742, 화승 혜식 등 6인 )
요즘 웹툰도 팀을 이뤄 그리는데
이 정도 그림도 규모가 커 에이스만 뽑아 집단 창작한 기록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위해 촬영감독, 조명감독, 동시 감독, 섭외부장, 미술팀, 분장팀, 헤어팀,담당 피디, 조연출, 제작사, 그립팀, 발전차 이런 식의 담당분야가 갈리는데 그렇게 이해하면 될 듯하다.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a/AVvXsEiw_Q9N1Y9VhznynsypAHwKmwZ1aEc1z_IHoTJHFr3pY9Vz1pDDZusE7XKDho21WTF38k9EWB65AgX7JIjUrQsZZOiB52ZnAGl_geEX7nwUwXwH4Gkysmmvxw8o1y0Vhxko1XMVMs1IUghKc1wdsdfx9ahcPgIExa0GQOqk_MxGieEEGHUZSA=w480-h640)
노스님이 이르길 초를 그리기를 3천 번 하였다고 전한다.
그것도 일종의 수행이라고 받아 들인 듯한다.
조선후기 임진, 병자 양란으로 사망자가 급증하자 원혼을 달래는 명부전을 많이 지었으며
죽은 자를 극락왕생 시키는 지장보살을 많이 보셨다.
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수요가 폭발하다가 경제성장이 일어나고
안정기에 들어서자
일감이 줄어든 것은
당시 경제상황도 대체로 예측할 수 있다.
대흥사에 천불 운송 중 다른 배에 실은 768구가
사고가 나서 일본을 거쳐 다시 돌아 온 흥미로운 사건
다시 돌려받은(?) 불상에 정약용의 제안으로
일본日本이나 일日자를 세겨 놓았다.
소조지장보살상 조선전기 작품
전남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발견된 저고리
1662년 궁중 나인이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부부의
발복을 위해 조성
부모를 모두 잃고 4살에 제주도에 유배 가서
형 둘의 죽음을 지켜 본 경안군의 불행한 삶을 생각하면
복권(1659년) 이후 조성한 듯하다. 하지만 3년 후 죽다.
단응이 19인과 더블어 1681년 2월부터 6월까지 충남 마곡사 영산전 칠불좌상 중 하나
단응은 주로 경북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기록으로 충남에서도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1684년 숙종 때 단응 등 조각승 9인이 주역까지 삽입하여 불교와 유교의 혼합을 도모하였다.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매점 앞에서 길고양이에게 누군가 먹을 것을 주었다.
다음 전시👉전시기간이 제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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