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6년과 프랑스 비시정부하에 나치 협력 4~5년은 비교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한국전쟁 당시 북한 부역자와 비교해야 한다는 글을 읽은 뒤 끄덕끄덕하던 중 하나의 화두로 남아 있었다.
저자는 관악산 밑에서 도를 닦다가 관악산 밑에 아주 터 잡고 교수님이 되신 분이시다. 아마도 영국사를 공부하면서 아일랜드와 영국과의 관계에 인상을 받은 듯하다.
1970년대에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재연구를 통해 저항 세력과 협력 세력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해외 연구에 대해 언급하며 일제강점기 상황에 대해 돌아보고자 하고 있다.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의 역사 상황과 우리나라를 단순 대입하기는 여러 상황 자체가 다르다.
예가 맞는지 조심스럽지만, 한국에 태어나 북한에 대해 한국전쟁의 남침만 교육받고, 무장 공비 드라마를 자주 보고 남북화해 분위기에 민족적 차원에서 북한을 지지도 하지만 때때로 보이는 북핵 위협과 상호 갈등에 공개적으로 비판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통일되어 반통일주의자로 낙인되어 이분법적 비판을 받는다면 과연 그것이 온당한 비판일까?
<우리 역사 최전선, 박노자.허동현, 푸른역사(2005)>에서 윤치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고, 도서관에서 본 영문일기의 많은 양에 무언가 탐구하고픈 욕심이 늘 있었다.19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일기를 거의 영문으로 썼다!
시간대별로 사건별로 그의 사고방식은 변화를 거친다.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우리 민족이 어느 정도 이익을 받기를 기대하고, 홍콩의 영국이 일본에 항복하자 자신을 인종 차별했던 서구권에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다.
1934년 캐나다 출신 선교사 하디가 영어책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것을 10년후 사라질 언어라고 비하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의 근대식 군대에 조선인이 참전함으로써 청년들이 일본의 호전적 상무정신을 익히길 기대했던 인물. 장제스가 중일전쟁 당시 만주를 내주고도 선뜻 참전하지 않은 이유가 일본육사 유학 중에 알게 된 일본군대의 우수성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https://dankunjosun.blogspot.com/2018/03/blog-post_31.html
꽃을 사랑하고 예술적인 일본 사람들이 잔학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 하며 이토 히로부미 동상을 도쿄에 세우면서 조선에 기부를 요청한 사실에 반발한 기록
1900년대에 앞으로 2000년에는 세상이 좀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던 인물
영국사를 공부하며 영국과 스코틀랜드처럼 또는 350년 동안 합스부르크 지배하에 있으면서 독립한 체코처럼 우리와 일본이 관계 정립되길 희망했던 사람
(사실 영국사나 체코 역사를 나는 잘 몰라 뭐라 말할 수 없다.
윤치호는 미국 유학 중 매콜리 영국사 영문판 5권을 탐독해 정통한 듯하다.
나는 안 읽어 봤다.ㅠㅠ)
3.1 운동 당시 실패를 예견하고 협력을 거부하며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운동지도자를 비난한 기록, 주도세력인 천도교 지도자의 금품수수과 교세확장 의도에 대한 비난
비무장 시민과 여학생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외국인 친일인사 조차 분노한다고 기록,
서북파(안창호)와 기호파의 민족운동에 대립 과정에서도 의연히 안창호를 지원한 행위,
백만 엔도 못 걷히면서 천만 엔 모금을 목표로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한 것을 비판한 것,
낮은 임금에는 일을 못 한다고 버티다 낮은 임금에도 일하는 중국인들이 들어와 일자리를 빼앗아 번성하는 현상에 대한 기록
임시정부를 비롯한 각종 독립단체가 금전적 요구를 하자 자신들의 신변에 위험을 준다며 비판하던 인물
당시 조선인의 무지와 악습에 절망했기에 장기적 개혁방안으로 교육사업에 역점 한 현실론자
배화학당의 이름을 지은 사람
1941년 연희전문 교장에 선임되었을 때 골치 아플 것 같다고 한탄했던 기록.
45년 12월 사망 직전까지 연희전문 재단 이사장직을 유지하였다.
대한제국 하 왕실의 영어 통역과 문서 번역 작업을 하고(네덜란드인에게 4개월 배워 영어 능통)-일본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했고 아마도 러시아 외교사절의 통역을 하며 그들이 여러 언어를 하는 것에 자극을 받은 것에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갑신정변 당시 현장에서 통역을 했고, 김옥균과의 친분으로 중국으로 도망갔다가 미국 유학-유학 당시 복습을 안해 시험 망친 것도 소상히 기록-으로 당대 최고 엘리트가 되었으나 망국의 조국 아래 소극적 저항하면서 교육사업에 매진하다가 해방을 맞이한 인물에 대해 호기심과 의문, 연민이 생긴다.
👉 갑신정변이 일어 났던 우정국 (조계사 옆)1889년 미국 밴더 빌트대학 유학중 3,300년전 미이라를 보고 신기해 했는데, 나는 최근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처음 보았다,,👉https://dankunjosun.blogspot.com/2020/01/egypt-story-of-lifedeath-and.html
어쩔 수 없이 어두운 시기 인재로서 쓰임을 받았다는 것도 이명래(1890~1952) 고약을 만드신 분처럼 일제강점기하에 한 번도 면허를 취득하지 않았던 분을 생각하면 또 다르게 받아들이고 싶다. 자꾸 권하는 데 여러 번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해서 총리를 하신 분이 생각난다.
👉흥아유신기념탑 연세대학교 제중원 기념관 뒤 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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