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트위터 글을 읽고 도서관에서 대출하다.
학생운동 과정에서 자주 듣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라는 구호가 이수병 님의 외침인 줄 어렴풋이 알고 있다가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게 되다.
아마도 이 구호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 1988년 연세대에서 열린 8.15 남북학생회담 집회였을 것이다. (아래 당시 스케치와 해설을 적는다. 오직 현장에서 보고 들은 오래된 내 기억에 의존한 것이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당시 현 연세의료원 쪽 연세대 정문 좌측의 난간을 뜯어내고 대치하던 시위 학생들
정문 수위실 위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굴다리에서 이동하며 인원수가 적어진 전경을 쇠파이프로 공격하여 방탄모와 방패,식수통을 뺏어와 이쪽 담으로 넘기었다. 학생들에게 맞아 길에 쓰러져 누워있던 큰 체구의 전경이 떠오른다.
👉중앙도서관 앞 단상의 지휘부 머리를 삭발한 분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평화 시위를 주도하며 정문을 나갔다가 전원 체포되자 몇 번 더 전진했고 페퍼포그를 앞세운 시위진압과 백골단의 체포로 무력화되자 우리도 싸우자는 방송이 나왔고 화염병 투척과 투석전이 벌어졌다.👉페퍼포그 발사 장면 일명 지랄탄 굴다리에서 쏘면서 백골단이 몰려왔고 앞도 보이지 않고 구토는 나고 눈도 맵고 아마도 백주년기념관 앞까지 날아오지 않았나 싶다.
👉날이 엄청 더워서 전경들이 웃옷을 벗고 있을 때도 있었다.
👉 연세대 주변에 많이 있던 기자들. 하지만 내가 찾아보지 않아서 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많은 현장사진이 보도되지는 않았다.
👉abc방송사에 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외신기자들이 많았고 학생회에서 선언문 낭독 시 여학생이 영어로 번역방송을 했는데 세련되고 강한 억양의 영어 발음이 기억난다. 아마도 그 당시 영어 발음으로 학생 수준에서는 최고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어른들은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데모만 한다고 비난했는데 저 정도면 뭐 공부도 잘하는 학생.
책의 서술 방식이 건조하다. 주변 국제정세나 정치 상황을 먼저 밝히고 이수병 님의 개인 상황을 설명하는 좀 특이한 서술의 연속이다.
아마도 한반도의 정치 상황이 냉전 하의 긴장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하기 위한 듯하다.
눈길은 끄는 것은 4.19 직전의 한국 경제 상황을 미국의 잉여농산물의 과잉수입이 농가를 피폐하게 했고, 미국경제불황이 원조물자 감축을 불러와 중소공장의 파산과 도시 빈민, 실업자가 늘어났다는 시대적 상황이 정치부패에 민감하게 폭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사전 설명하는 서술방식이 좋았다.
경제적인 상황도 같이 서술해 지금 우리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이수병 님의 고향은 경남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 구산마을인데 임란 때 곽재우 의병장이 북을 달아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는 현고수가 있다는 서술에서 곽재우 처럼 다재다능한 이수병 님도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다 펴지 못하고 안타까운 삶을 마감했다는 복선이 아닐까 싶었다.
👉2012년 4월 의령 소싸움
1953년 부산사범학교에 4등으로 합격 입학,
새벽에는 신문 배달, 저녁에는 과외알바,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장사, 겨울에는 국제시장 경비나 청소 알바를 하면서 지냄
3학년 '암장岩漿'(마그마, 변혁 운동 상징) 모임 주도
당시 부산 국제시장 건너 보수동 골목에서 미군 병영에서 나오는 수많은 잡지나 고급서적을 통해 사회과학 지식습득
1959년 신흥대학교( 현 경의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할 때까지도 고학을 하셨고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총명하고 공부를 무척 잘 하셨다. 그리고 꽤 성실하고 부지런한 대학 생활을 하셨다.
독일어를 독학 1년 만에 <자본론>을 술술 읽었다 하니 천재가 아니었나 싶다.
학과 수업 중 케인즈주의에 대한 강의 중 미국경제부흥이 케인스학파의 정부개입이론이 아닌 2차 대전이나 한국전쟁 같은 전시 경제가 큰 이유라고 주장한 이력은 놀랍다. 개인적으로 한겨레신문에서 조국 교수가 뉴딜정책을 비판하면서 주장한 논리와 똑같았다.
1959년 서울의 대학가 비판도 눈에 띈다. 일류대학 열병에 빠져 있었고, 엘리트주의, 친미 성향 지식인 복제라고 비판한 점은 지금 우리 대학가나 마찬가지다.
1960년 총선을 앞두고 55개 대기업에 77억 환을 특별대출을 해주고 30억 환을 기부케 하는 정책에서부터, 어용지식인들이 '정부통령선거 중앙대책위원회'에 대거 들어가게 된다. ( 연세대 백낙준, 이대 김활란, 중대 임영신, 한대 김연준, 건대 유석장 등)
1960년 2월 28일 대구 민주당 선거 유세 참석을 막기 위한 일요일 등교에 대한 항의 시위가 경북고등학교에서 일어났다.
1961년 3월 민족일보 공채에 수석합격
1961년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 궐기대회에서 자신은 배후가 없다고 재치있게 행동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수감생활
👉징벌방 상상도, 방성구, 뒷수갑, 창문없는 방, 산소 부족 의식 희미해져1964년 한국전쟁으로 잉여자본이 생긴 일본이 해외 투자처로 한국을 선택해 미국의 압력과 함께 한일국교 정상화 추진 , 6.3 항쟁 발생
수감생활 중 보리 밥알을 뭉쳐 바둑을 두고, 나무 공으로 탁구 비슷한 '유구' 운동, 정규적으로 공동강사진을 꾸려 수업
윤길중(진보당 사건) | 서예, 한시 |
안민생(안중근 오촌 조카, 만주에서 독립운동) | 중국어 |
이수병 | 우리 말과 글 |
동풍, 서풍 말고 마파람, 하늬바람, 금바람 등 우리 말 쓰기 운동
유한종에게 일본회화을 배우며 하루 한 시간씩 일어 사전을 통 암기를 했다. 후일 일어학원 강사를 하는 밑거름이 된다.
간수 중 일부는 이수병에 호감을 가지고 불온서적을 몰래 자비로 넣어 주었다. 일어판 <자본론>, 스즈모도의 <경제학 원리론> 10회독, 대화체 소설 <수경선생>을 집필했으나 유실
수감생활 중 자칫 정신적으로 피폐해 질 수도 있는데, 나름 낙천적이고 건설적인 시간을 보내 것을 보면 여운형 선생님의 수감생활과 비슷하다.
멕시코 혁명가 시빠따를 이야기하며 의기를 복돋아 주었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는 분이시다. 하여간 박학다식한 분이시다.
민족일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안양교도소에서 같이 수감생활을 했던 조선일보 논설위원 송지영(후일 민정당 국회의원, KBS 이사장)의 입사 제의를 거절
출소 후 당시 서대문구(현 은평구) 녹번동 시장에 지물포를 열어 생계를 유지
정보부를 피해 <경락연구회>라는 기氣치료 위장 모임 결성, 조직 재건 및 시국 분석 및 토론
학생운동을 주시하며 정의감이나 젊은 혈기만으로는 실패한 4.19의 과오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연대, 역량 강화, 전술 등을 모색
종로에서 <삼락일어연구회> 일어 강사, 운동권 지도자들이 수강생으로 위장 수강을 하며 정보부의 감시를 받게 된다.
푸른 산이라는 우리말 '파라뫼' 대학생 독서클럽 활동
월남전을 보며 외세 타파를 위해 베트남에 없는 정글을 구축하기 위해 인(人)의 정글 구상
74년 4월 긴급조치 4호로 구속
74년 결심 공판에서 "사법살인으로 국민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변론한 강신옥 변호사 구속
구명 운동을 한 조지 오글 목사, 시노트 신부 등 종교계 인사들 국외 추방
75년 2월 출소한 김지하가 감옥에서 만나 이수병, 하재완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고행-1974...>를 동아일보에 기고 인혁당개건위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
4월 7, 8일 고려대에서 "박통 모의인형화형식"등 격렬시위로 학교 폐쇄 군대 진주(긴급조치 7호)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등으로 고문받다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선고 받고
다음날 4월 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돌아가시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전 검찰총장) , 민복기 대법관(2000년 자랑스런 서울법대인), 황산덕 법무부장관 등 법조인으로 권력의 시녀로 몰락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