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ne 21, 2024

영화 < 판문점 PAN MUN JOM : The front line of Ideology (2024 ) >- 우리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다큐이다. 박해일 배우가 정치색으로 공격받을 소지가 있는데도 용기를 내어 내레이션을 맡아 주었다.

☝주변에 개봉관이 별로 없어 가장 가깝고 덥지 않은 시간대를 찾아 가다. 문제가 많았던 건물 주인이 바뀌었다.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자주 발행되는 도서문화상품권을 이용하려니 너무 어렵다. 왜 이렇게 복잡하고 쓰기 어려운 것을 만들어 냈을까? 결국 쓰지 못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 보거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보면서 느끼는 "과연 저기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세계인들은 한반도를 바라보며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심에 판문점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1950년 10월 9일 북진

1950년 10월 19일 평양점령

1950년 10월 중공 대만 점령계획 무산

1950년 10월 19일 펑더화이 30만 대군으로 북한 지원

1951년 1월 4일 후퇴

전쟁 발발 후 저의 3개월 단위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당시 일반 국민들은 정말 어리둥절하고 누굴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 남아야 할까 고민의 고민을 해야 했던 순간순간이었다.

북한군 포로는 13만, 미군과 한국군 포로는 1만이 되어 가면서 양측은 포로 교환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임진강 옆 판떼기 판板, 문 문 門, 상점 店 판문점이라는 일제 강점기부터 있던 지명에 협상 장소로 군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남일이라는 북한군 협상당사자는 고려인이고 소련 유학파며, 2차 대전 당시 소련군 대위로 참전한 소련통 군인이었다.

미국 수뇌부는 전쟁은 소강상태라 자존심 상하는 무승부가 되더라도 체제승리를 장식하기 위해 북한군의 자유의지를 부추기며 월북은 자제하며 미국으로 입국을 불허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일관하였다. 그리하여 중립국 인도를 88명이 선택해 가게 된다. 그들의 행방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최인훈 소설의 <광장>)


통영에 북한군 A급 포로를 따로 모아 포로수용소를 또 만들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가 미 대통령이 당선되고 소련은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전쟁을 주도하던 국가에 정권이 바뀌며 초창기 공세적인 주전론자들이 대대적으로 물갈이되며 휴전이 된다.


대대적인 남북 포로 환영식 이후 

남과 북은 포로를 1년간 감시하며 재교육하였고 1급 의심 포로는 즉결 처분하였다. 북한의 A급 친북 포로의 과격 투쟁은 다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북으로 돌아가 처형당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였다.

공동경비구역이 된 판문점에서 북한군과 남한군은 서로를 챙겨주며 친목을 도모하며 민족애를 다졌다. 하지만 미군에게는 사납게 대해 헨드슨 소령 사건이 발발했다.

1978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미군 장교는 죽음 앞에서도 확전을 자제하기 위해  발포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후 폴 버니언 작전으로 미루나무를 벌목했고 북한군은 미국의 압도적인 전력하에 묵인하였다. ( 개인적으로 중학교 수학샘이 참전해 조금 들었다.)

1984년 러시아 유학생이 판문점을 통해 월남하여 총격 사건이 발생해 다수의 북한군 사상자가 발생했고 미군은 도끼만행 사건의 응징으로 생각했다.

베트남전의 한국군 참여로 (동서양 전쟁 구도가 한국군 참여로 무색해졌다. 박정희는 자신의 남로당 경력을 미국의 의심하자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참전을 감행했다)

1968년 북한이 베트남전 참전 의사를 밝혔지만 확전을 경계해 자제하라 하자 후미를 친다고 김신조 일당 남파.

베트남 전쟁에서 터득한 기술로 판문점 양쪽으로 철책이 세워 지다.

김신조는 인왕산 기슭 세검정에서 자폭하려다 살고 싶은 회의가 생겨 투항, 김신조 일당이 절단하고 들어 온 철조망은 사후에도 군에서 알지 못함 ㅠㅠ

1972년 베트남전 지원으로 미국과 핵전쟁 공포에 빠진 중국이 소련과의 갈등으로 닉슨 대통령과 전격 만나면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생격 이후락이 김일성을 만남

미국과 소련, 중국 등 주변국의 정세변화가 한반도의 온도변화에 직접적 요인임을 시사.

냉전이 한창일 때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으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푸틴과 김정은이 북한을 전격 방문하고 노르망디 작전 80주년을 맞이한 지금 전쟁의 먹구름이 유럽 주변을 감싸고 있다.

👉https://chappatte.com/en/images/it-was-80-years-ago



☝이화여대윈도우스 스트라이크모니터링 모임에서 만든 조류 충돌 방지 유리

👉https://www.instagram.com/windowstrike_in_ewha/


☝전쟁의 폐허 속에 일어난 지금 우리는 야생 조류 유리창 충돌도 걱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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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마고에서 북촌 시네마 행사일환으로 송원근 감독님을 모시고 석화정(화정동북아연구소)님과 함께 영화 관람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은덕문화원 숨 요가를 하러 갔다가 옆 마고 카페/살롱 마고 북촌시네마에서 영화 상영 소식을 알게 되었다.






☝송원근 감독님과 석화정(화정동북아연구소)님이 관객과 대화하고 있다.

한반도의 운명이 이곳에 사는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고 주변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격변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인식하며, 이번 겨울 미국 대선 상황을 주시해야 하는 현실이 두려움과 안타까움으로 교차한다.

👇대충 정리한 송원근 감독님과 관객과의 대화 부분이다.

-미국에서 공개하기 시작한 한국전쟁 자료를 한국인의 입장에서 편집하였다. 이 자료는 미국 Big Picture라는 냉전 시대 미군이 최전선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어 애국심을 끌어 올리기 위한 일환으로 제작된 자료이다. 하지만 미국적 시각을 제거하고 우리 입장에서 다시 객관화해서 정리했다.

-중국이나 동유럽 자료, 대한민국 편집 이전 자료(한자 필기체로 기록; 전문가를 따로 섭외해야 한다) 등은 접근하기 어렵다.

-코로나 이후 판문점에 들어갈 수 없었다.

-판문점에 초청되어 옛날 원래 위치를 안내 장교에게 물으니 잘 몰랐다. 30년 근속 군무원이 위치를 바로잡아 주었지만 별로 관심 없어 보였다.

-정전 70년이지만 그곳을 관리하는 유엔사 장교는 관심 자체가 없었다.

-T1, T2, T3라고 지명하는 회담 장소의 "T"는 temporary란 뜻이었다. 정전 70년이 지났지만, 아직 임시 건물이라는 표현에 충격을 받았다.

-공동경비구역이 옛날처럼 남북 군인이 화해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라고 물어도 관심조차없었다. JSA 남북 군인전우회를 할 수도 있었다.

-정전 협정을 위한 회담에 기자를 초청했는데 한국 기자 두 명(조선일보, 서울신문), 일본기자 10명, 외국인 기자 100명을 초청했다. 전쟁은 우리가 치렀는데 우리는 정작 중요한 순간 배제되었다.

-이런 느낌을 관통할 수 있는 이전의 미국 자료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10세, 12세 되신 생존자를 찾아 포로수용소에 관해 물어 보았다.

-군사 분계선에서 고지전을 치른 93세 참전 용사 인터뷰를 담았다.

-지금 판문점은 유엔사 관할이고 현직 대통령도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다.

-군사혐정 당시 중국군은 중국인민지원군 자격으로 슬며시 빠져나갔다. 이승만은 대통령 지위였고 김일성은 군사 통수권을 갖고 있어 북한과 미군 사령관이 교섭을 했다. (우리는 교섭이나 관할 대상이 아니다)

-이후 유엔사 관할을 한국군에게 이전하려고 했으나 북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18. 9. 19 군사합의는 남북 군사 35명씩 비부장으로 노란 완장을 차는 것인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으나 지금은 2023.11월 폐기되었다.

-여러 자료나 구체적인 내용은 대부분 주인공을 "판문점"에 맞추기 위해 과감히 정리했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정책으로 풀려난 사람들을 현재 찾을 수 없다. 중공군을 자극해 휴전선 남쪽 금성군 전투를 유발하여 우리가 남하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작전도 구상하는 등 감정이 나빠졌다.

-일본 독립영화관에서 상영 요청이 들어와 자막 작업을 하고 있다. 국제영화제도 알아 보고 있다.

-한 외국인 기자는 미국 영상을 한국인 입장에서 정리한 것을 신기해 하지만 너무 내용이 어렵다고 지적하셨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허락없이 종전이나 평화합의를 법적 지위가 없기 때문에 판문점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노량대첩을 앞 둔 이순신의 울분과 똑같다. 전쟁은 우리가 치렀는데 협상은 명과 왜가 한다.

-포로수용소에 대한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저녁에 몰려온 비구름과 쏟아진 빗줄기가 카페 마고 옆 창덕궁 돈화문에 먹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다가올 한반도의 안보 위협을 상징하는 듯하다.

조선왕조를 견디어 오며 온갖 풍파를 견디어 온 궁궐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한반도 전쟁은 임진왜란처럼 모두 국제전이었다는 석화정(화정동북아연구소) 님의 말이 떠오르며-수당의 고구려 전쟁, 당나라의 백제, 고구려 침략. 백제부흥운동과 왜, 당나라와 신라 전쟁 등- 한반도의 주인이 자주적으로 자기 안보를 해결할 수 없으며 왜 우리 안보를 주변국의 사정으로 먼저 결정되는가에 대해 무력감이 몰려온다.

☝고대 한.중.일 관계를 국제전의 관점에서 백강 대전을 설파한 김용운교수의  <풍수화>

이를 바탕으로 그림 내 웹툰 <건지산만신>👉https://dankunjosun.blogspot.com/2019/06/geojisan-manshinten-thousand-spirit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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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헤이리에는 이북오도청이 주관하는 동화경모공원이 있다. 한국전쟁으로 분단이 되자 남쪽에 남게 된 이산가족이 북쪽이 보이는 이곳에 장지를 마련하였다. 지인의 부친이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거제 포로수용소를 거쳐 남한에서 살아가시다 최근 돌아가셨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셨지만, 생전에는 끝내 가보지 못하셨다. 분단은 아직도 우리 생활 곳곳에 상처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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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이누가미 일족 (1976) > -옛날 영화인데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의 홍보 메일을 받아 확인해 보니 재팬파운데이션 무비페스티벌을 상암동 영상자료원에서 하고 있었다. 👉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578 예약을 못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