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샤넬은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여자 옷은 여자가 만들어야 한다."
그녀가 자라오면서 겪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2차대전속 나찌부역의 비판속에서도 재기하여 정상에 오른 이력은 과연 놀랍고 대단한 것이었다.
책을 읽기전 그녀에 관한 영화를 두편 먼저 보았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코코 샤넬(2009)>이다.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http://dankunjosun.blogspot.kr/2011/09/blog-post_08.html
이 영화에서 논란이 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여부는 이 책에서 확인한 바로는
디아길레프의 인연으로 <봄의 제전>을 후원한 것,스트라빈스키와 같은 집에 있었던 것,말년의 그녀의 침상에는 스트라빈스키가 만들어준 러시아성상이 놓여있었다는 사실등이나 둘 사이가 연인이었다는 언급은 없다.당시에 더 많은 남자들이 사실 샤넬 주변에 있었다,,,,
영화<코코 샤넬(2009)>은 이책의 중반부까지의 내용이다.노동자(어부)의 옷을 귀족에 입힌 디자이너(이 책에서는 웨스터민스터 공작의 플라잉 클라우드 호 선원 복장에서 착안했다고 나온다.)공휴일을 싫어해 평생 일요일도 작업했다는 것이 하나는1893녀 오바진 고아원에서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일요일마다 기다린 것에 대한 상처,다른 하나는 노동이 정신적 고통을 감소시킨다는 옛애인(아서 카펠)의 독서토론 내용이었고 결국 일요일날 죽었다.
아서 카펠의 신비한 눈빛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아서 카펠의 신비한 눈빛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코코 샤스넬이란 잘못된 출생기록부 오타가 정정되는데 30여년이 걸린것도 그녀의 불행한 성장배경을 단정적으로 보여준다.그래서인지 유년기 비극적인 기억이 많아 그에 대한 열등감이 많았다고 한다.
어머니 잔이 뒤마의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 부인과 같은 병명으로 사망한 계기로 동백꽃이 사넬의 상징이 되었다..하루만에 시드는 꽃의 특성상 화려한 과거를 표현하기에 적당한 소재로 적합했다고 한다.불행한 어머니의 죽음으로 결혼생활에 회의적이었다고 함.
결혼한 그녀의 여동생이 자살하여 자신의 작품목록에서 웨딩드레스가 사라짐
불행한 성장과정과 남루한 기숙학교의 옷입기로 드러나는 계급성에 "Less is more"(모자른 것이 많은 것이다)라는 샤넬 모토가 나왔다고 추측한다.
바느질에 재능을 보이고 영화<코코사넬>에서 처럼 노래를 불렀다.
지방 도시 물랭에서 꼬꼬댁 (프랑스상징 닭)과 관련한 노래와 코코(강아지이름)의 노래가 합쳐져 가브리엘 샤넬이 코코 사넬이 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오페라가수가 되려 했으나 가창력이 부족해 좌절했던 이력,,,,
이것이 후일 패션쇼 무대공포로 이어진게 아닌가싶다.
(영화 <코코 샤넬(2009)>의 마지막 장면)
에티엔 발장을 만난 것이다....코코 샤넬은 사람(연인)과의 만남이 그의 상승효과를 배가 되도록하는 인복많은 삶을 살았다.
프랑스 에티엔 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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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당시 여자가 바지를 입는게 금기시 되던 시절 샤넬은 승마바지를 입고 등장하였다.
프랑스혁명주체는 귀족복장에 반대에 긴바지를 입은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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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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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이 연인을 통해 알게된 배우들이 샤넬모자를 애용하고 잡지에 나오면서 샤넬도 같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지금으로 치면 새브랜드가 유명연예인과 스폰서로 계약을 맺어 같이 유명세를 탄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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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업가 아서 카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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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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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대공 드미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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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스 향수 제조전문가 에르네스트 보로 소개받아 샤넬No.5제작
옷도 러시아풍 슬라브이미지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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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발레단 창시자 드아길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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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차 간 베네치아에서 1908년 러시아발레단을 창립한 디아길레프의 인연도 샤넬에게는 자극제가 되었다.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에서 1913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초연당시 실제로 그녀가 그 현장에 있었는지 논란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디아길레프와의 인연으로 관람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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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체류 당시 영화제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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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출연할 배우의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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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모딜리아니,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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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면서 유행정보를 빠르게 입수.그러나 인간적인 면을 중시하고 작품수집은 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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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피에르 르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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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광고문안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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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물이 어떤 분야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주변의 환경이 중요한데 당시 파리는 1차대전으로 사망한남자를 대체할 여자의 참여가 활발했으며, 그녀의 애인인 아서 카펠은 영국의 새로운 유행을 늘 보여주며 자극을 주었고 문학,정치,역사,종교등 다양한 교양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동거에 들어간 둘의 거처 벽난로에 부처상을 놓았다는데 입센로랑의 유품에도 부처상이 있었다는 것,,,아서 카펠이 교통사고(1919년)로 사별후 그가 읽던 힌두교경전을 탐독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유럽의 식자층은 어느정도 동양의 정신세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살짝 알 수 있다.,,그런데 그 목숨같은 사랑이었던 남친 카펠의 유언장에 그녀말고 다른 정부가 있었다니,,,그의 죽음은 여러면에서 본격적으로 그녀가 홀로서서 변화하는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또한 별점을 신봉하여 자신의 별자리인 사자상 수집했다 한다.
1913년 노르망디(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그곳이 맞다.불안한 유럽정세에 여차하면 해협을 건너 아서 카펠의 고향 영국으로 튀려는 심산이었다.)의 도빌이라는 상류층휴양지에서 샤넬이라는 분점을 낸다.
샤넬이 계급의식이나 정치,사회적 의식의 부재 속에서 옷의 형태로 여성의 진보를 이룬것은 흥미롭다.
샤넬은 혼란한 시대에 옷을 통해 내일의 사회를 미리 맛보게하는 재능을 발휘하였다.
(운동권 물 좀 먹은 사람과 이야기 좀 할라치면 맑스,앵갤스니 체 게베라니 광주니 한창 얘기하다가 니가 뭘아냐로 깔아뭉개던 일을 겪은바 전혀 그런 이론적 기본없이 사회진보를 다른방식으로 이룩한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스티븐 잡스가 아이폰을 만들고 페이스북이나 구글로 인해 제3세계가 민주화운동을 촉진하고 우리 일상이 편리해졌다면 그것이 혁명이고 맑스니 뭐니를 아는것은 결코 우선시되거나 중요하지 않다.)
항상 파격적인 의상혁명을 추구한 그녀였지만 1960년대 미니스커트는 노출증이라고 비난했다.
1차대전으로 프랑스에서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150만이나 사라졌으니 남은 공간은 활동적인 여성들의 차지였다. 단순,편안한 옷,명쾌한 풍의 샤넬옷이 인기를 끌다.
(샤넬의 라이벌이었던 폴 푸아레는 군복제작으로 특수를 누리다.)
샤넬은 의상을 만들때 직접 모델을 세워놓고 작업했고 스켓치나 인체모형을 쓰지 않는 스타일이었는데 전문적인 의상교육의 부재일 수도 있고,직감적이 대단히 뛰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영화 <사넬과 스트라빈스키(2009)>에서는 이점이자신과 스트라빈스키의 공통점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샤넬은 막장출신에서 정상으로 홀로 올라섰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갖는 오만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유럽에서 번져가는 계급적 투쟁에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1936년 일어난 파업으로 샤넬은 캉봉 가에 있는 자기회사에 출근을 저지당했을때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이때 충격으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직원해고후 전의상실 폐쇄시켜버렸다.
2차 대전당시 동료였던 피카소나 헤밍웨이가 했던 태도와 그녀는 반대로 행동했고, 처칠과의 친분을 이용해 러시아원정으로 패배한 독일을 위한 협상를 준비했다.(이른바 '모자견본'사건)이후 비난이 거세지자 독일연인과 중립국 스위스로 잠수
하지만 68혁명때는 파리현장에서 학생시위대를 지지한 것은 그녀의 정치의식이 변한것일까?
2차대전이 끝나고 나찌부역으로 스위스로 망명한 그녀는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만든 뉴룩(New Look)에 밀리기 시작한다.
1953년 일흔 살에 컴백했지만 실패했고 2년후 다시 화려하게 재기하였다.
샤넬은 1920년 당시 자신의 옷에 짝퉁이 나오는 현상을 자신의 가치가 치솟았다는 증거라며 즐거워했다고 한다.일흔살이 넘어서도 유년시절의 기억때문일까 재래시장에서 짭을 파는 사람들도 격려해줬다고 한다.경쟁자인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몹시 부들부들한 것과 대비
상품가치를 높이고 우수고객을 확보하기 귀족이나 명문가 출신을 직원으로 채용
(대기업이 금수저 자제를 채용하는 원인??)
이들이 파리사교계에 대신 참석하게해 시류에 민감한 정보 수집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아 고객들에게 신비감을 줌
자신과 비슷한 헤어와 의상을 입은 작은사넬을 매장에 뿌려
이후 미국에 진출했지만 지겹게 보아온 유대인학살영화가 헐리우드를 장악한 유태인의 자화상이었고 1930년대 그곳에서 사넬도 별로 대접을 못받았다하니 씁쓸하다.
에디트 삐아프도 미국공연중 미국문화에 좋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출생이나 성장,카리스마,나찌 부역,남성편력,연인의 죽음,고독 등 닮은 점이 참 많다.
동시대에 같이 살았고 코코 샤넬이 30년 인생선배다.
그녀의 마지막에 그녀가 좋아한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을 빗댄것은 너무 좋았다.
그녀의 전기를 읽으며 러시아혁명,1차,2차대전,전후 상황을 알게 되고,여러 명사를 유심히 알 수 있게 되어 좋았다.1963년 케네디 암살당시 재키가 입은 옷도 샤넬 옷이었다니,,
책을 읽으며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다부진 입모양이 보이는 듯하다.
당찬 그녀의 생전 사진도 그가 강철같은 여인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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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마리 로랑생전을 다녀왔는데 샤넬의 초상화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다.샤넬다운 행동이다,,,,
http://dankunjosun.blogspot.kr/2018/02/marie-laurenc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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