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에 관한 인식이 뇌리에서 텅빈것은 많은 만주국 출신(박정희,정일권,백선엽등)이 해방이후 한국정부의 주류로 활동하여 일체 금기사항으로 언급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 실체를 알 수있는건 <나라가 불탄다>라는 모토미아 히로시本宮 ひろ志의 일본 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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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가 전쟁통인데 한반도만 오히려 안전지대같은 느낌마저 든다.
간헐적인 투쟁이외에 그 투쟁의 전후배경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없다보니 해방이후의 여러갈래의 대립과 노선갈등도 막연하고 뭔가 저 산너머일이 되어버려 한반도내에서 벌어진 참혹한 6.25의 원인도 오리무중으로 빠져버린다.이 책에서는 국공내전 당시 만주에서 조선인(이후 북한건국주도)이 중공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한국전에서 중공군의 개입에 혈맹의 연을 언급하게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왜 급격한 군국주의가 되었으며,어찌하여 중국은 대국인데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으며 그 가운데 독립지사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협력,투쟁하며 조국독립을 갈망했는지 중일전쟁을 내용을 통해 파편적으로 알던 지식이 하나하나 연결고리를 찾게 해준다.
방만한 자료를 특히 전공자도 아닌 분이 정리했다는데 놀랍다.관련 영화(<일대종사><색계><진주만><1941><도라도라도라><콰이어강의 다리><마이웨이>등)까지 하나하나 전투기기종 영화상 오류,과장까지 다 언급한다.뒤에는 무기목록까지 정리하였다.1941>
영화 <제독의 여인>에서 언뜻들은 적군백군이 어떻게 청산리,봉오동 전투와 간접 연결되며,황태현님의 <지역패권의 나라>,모토미아 히로시本宮 ひろ志<나라가 불탄다>에서 언급된 일본군국주의의 특정지역(죠슈,사쓰마 지역)군벌의 독선적인 행보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잘 나와있다.
<중국의 붉은별>에서 읽으며 간과했던 또는 일방적 주장, 장제스측의 국민군 근대화 노력과 군부의 많은 희생도 잘 묘사되어있으며 백단대전에 대한 중국공산당내 다른 의견도 알게 되어 뭔가 시야가 넓어지고 균형감이 잡히는 느낌이다.
장제스가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외부침략을 방어하는 이중역할에서 악전고투한 흔적을 볼 수 있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거사가 가지는 중국내 역사,정치적 의의도 다시 한번 되새김하게 된다.공산당,국민군,지역군벌 등이 사분오열되어 대일항쟁을 두고각각 자기 이익을 추구하던 중국내부정치싸움의 기폭제가 되었으니 말이다.1945년 연합국에 항복문서에 서명한 외상 시게미쓰는 이날의 폭탄 파편에 다리를 잃어 의족을 하게 되었다.
1932년 상하이 상공에서 중일 공중전이 벌어졌을 때 권기옥 여사가 최초 여류비행사로 참전한 기록은 놀랍다.이후 10년간 복무하며 중화민국 공군중령까지 되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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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일본에서는 2.26사태가 중국에서는 12.12 시안사변이 발발 중국과 일본은 서로 정점으로 치닷는다.중일전쟁은 우발적으로 갑자기 사전준비없이 일어났다.그동안 일본유학파 장교출신인 장제스는 근대화된 일본과 도저히 전면전으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군대를 착착 근대화시키며 준비하였다.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상한 전쟁
외부세력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서로 방관
일본은 총력전 경험의 부재임에도 단기전인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경험이 상황을 오판하게 만듬.만약 두 전쟁이 장기전으로 갔으면 일본은 파산할뻔 했다.천운-일본은 2천6백년이래 패한적이 없었다는 자체논리- 어쩌구 하며 미국과의 전쟁까지 확전.중국이나 미국과의 전쟁도 이때 승리경험으로 초반에 밀어붙이면 양쪽다 항복하고 협상할 것이라고 오판함.
러일전쟁에 관한 쓰시마 해전 <짜르의 마지막 함대>👉
https://dankunjosun.blogspot.com/2018/03/blog-post_31.html
중국에서 일본이 실지로 점령한 것은 자기 병영뿐
장제스는 상하이와 난징의 실패를 교훈삼아 대규모군을 동원해 정면승부하기보다 주력을 보존하며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적자원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공산군이 국민군에 써먹은 수법 일본군에 재탕
소련의 스탈린이 군부숙청으로 장년장교부재가 전쟁초기 독일침공에 무력한 원인이었다면 이후 청년장교의 적극적 투입은 유능한 인재 발굴이었듯이 중국전쟁 초기 많은 장성급인사의 궤멸은 자연세대교체효과를 유발(당시 중국은 농업국 시대 구태 장교가 많아 근대적교육을 받은 청년장교의 투입과 신식무기의 조화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중국에 16개 사단,한국에 1개 사단,본국에 2개 사단을 배치하여 더 이상 착출할 군인이 없었다.일본인은 한국인을 신뢰하지 않아 전쟁 초기 군인징용을 하지 않았음
중국국민군은 참담한 패배속에서도 집단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장제스는 사관학교 출신 답게 무리한 독려를 하지 않고 적절한 타이밍에 후퇴시키는 유연성을 보여 히틀러나 스탈린의 과오인 집단투항사태를 방지했다.
일본군이 자행한 많은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국가나 군인의 이미지 실추, 현지인의 협조 저하,민중반란등을 유발하기에 철저히 금지되는 근대군인교육사항인데 지켜지지 않은건 그만큼 일본군 수준이 오합지졸수준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에 대해 과소평가한 편이 있으나,오히려 일본침략이 장제스의 힘을 저하시키고 자신의 세력이 늘어나는 계기로 삼았다고 여러자료를 통해 증언한다.
백단대전은 100개 연대(단)이 참여한 전투인데 게릴라후방 침투 파괴전략이었으나 자신의 병력손실을 우려해 마오쩌뚱은 이를 비판하였다.현장 군부와 당지도부와의 견해차가 컸고,주더와 펑더화이는 심한 비판을 받았다.
일본이 마오쩌뚱이 있던 옌안을 직접공격하지 않은건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장제스는 현장에서 병사들을 독려했으나 마오쩌뚱은 옌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자 장제스는 소련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할 것으로 기대
1941년 노몬한 전투로 일본과 소련이 충돌후 일소중립조약을 맺어 일본은 동남아를 침공하며 원자재지원을 받고 소련은 70만에 이르는 병력을 독일전에 투입했다.
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이 쳐들어가 자원과 식량을 빼앗아감
김산의 죽음에 대해서도 강의실에서 체포되어 즉결처분된 일화를 소개한다.
공중전에서 중국군이 선전하고 소련지도부의 지원(대리전)과 훈련으로 막상막하까지 갔으나, 일본 제로전투기 등장과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군이 퇴각하며 심각한 열세를 보이며 무차별 폭격하에 장제스 첫아내도 사망
일본이 북부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자 영국과 미국이 중국을 지원하기 시작.플라잉타이거부대(비호대 飛虎隊)의 미군교관 셔놀트는 매춘부까지 운영하며 자유분방하게 융통성있게 부대를 운영하여 선방함
진주만 기습은 미국에 큰 피해를 주지않았다,일본군이 철수에 급급해 항만시설과 유류시설을 파괴하지 않았고 격침된 태평양함대의 8척의 전함도 수심이 얕아 두세달뒤 모두 수리되어 복귀하였다.
중일전쟁당시 독일은 텅스텐등 전쟁물자확보를 위해 중국을 지원했고 미국역시 자국경제에 도움이 되기때문에 일본에 석유등 물자를 판매했다.전쟁이 치닫으며 미국으로부터 석유공급이 중단되자 일본은 당황했으며,자원확보를 위해 동남아로 눈을 돌린다.
일본해군은 육군과의 자존심대결로 미해군과의 전면전이 불가하다는 자체판단을 하고서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미국이 참전한이후에도 중국은 별 대우를 못받았다.유럽전선을 우선시했으며 당면한 태평양전쟁 그리고 뿌리깊은 인종차별적 사고가 문제였다.
일본은 독일과 연대했으나 전쟁중에 딱히 연대효과를 보지 못했건 일본 외교의 오판이었다.두나라간 거리상 문제도 있었지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당시에도 일본에 정보를 주지않았다.
임시정부에 우호적인 중국에 서양열강은 한반도지배야욕이 아닌가 의심했다.
임정과 조선의용군과의 좌우합작 진공작전은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2차대전 당시 영국내 폴란드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폴란드내 공산당원으로 폴란드정부를 수립한 소련의 전례때문에 임시정부의 법통문제가 미국의 심각한 고민꺼리였고, 인도독립문제와 연계되기를 영국은 우려했다.
일본의 갑자스런 항복은 총력전으로 많은 걸 잃은 중국에겐 허탈한 것이었고 아직도 자국내 잔류한 1백만 일본군 문제로 미완상태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하는 문제가 되었다.독일수도까지 밀고 나가 의사당에 소련기를 꽂은 선례가 중국이 생각하는 전쟁종결의 모습이었으나 나름 중국인에겐 날벼락이었다.
미군의 한반도 상륙계획은 국토의 70%가 산악지대라 장기적으로 방어군에 유리하고 한반도 일본 양쪽 공격이 효율성이 떨어져 배제되었다.
만약에 한,중연합군이 일본본토에 상륙작전을 하여 일본왕궁성등 주요기관을 점령했더라면 하는 역사의 아쉬움이 짖게 남는다,,
8.15연설에서 장제스는 일본의 원조로 중공군을 제압할 구상을 한다.
종전후 국공배전으로 인해 친일부역자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권력층진입은 철저히 배제하였다.
중국점령군이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국공내전으로 철군
일본을 독일처럼 분할 점령하려는 JWPC-385계획이 맥아더의 강력반대로 무산
영화 <강철비>에서 잠깐 언급..
국공내전당시 만주등에서 중공군을 지원한 조선인들은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 남침핵심요인 됨.이후 중공군의 개입도 이때의 인연이 원인이 됨.인천상륙작전으로 세계이목이 집중되자 중공은 티베트 침략
국공내전 당시 미국의 이중성은 양쪽에서 모두 실패
공산화를 막으면서 강력한 중국의 탄생도 두려워한 미국의 이중정책은 양쪽 모두의 신뢰만 상실함.미국의 장제스에 대한 군사지원은 2류물품 위주였음
소련의 급부상으로 농업국가로 일본을 전락시키려던 초기 전략은 대폭 수정되어 일본의 신속한 부흥으로 바뀌었고 국공내전으로 타위완으로 밀린 장제스는 국제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과의 강화조약에 저자세로 임했다.오히려 패전국 일본이 큰소리치는 형국이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관계개선을 나선 미국과 소련과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고립을 타파하려는 중국의 저우런라이는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선언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포기.정권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중국 민중의 열망을 외면
일본은 가해자로서 침략에 대한 사죄와 보상이 아니라 경제원조 명목으로 아시아국가에 수혜를 베푼다고 생각
당과 신라가 백제,왜 연합을 격파하고 고구려까지 멸망시키자 왜는 해안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방어성을 세웠다.
몽고가 고려를 복속시키다 여몽연합군이 두차례나 일본을 침략하였다.
한반도가 일의 식민지가 되자 중국은 본토에서 일본군과 8년간 치열한 공방전을 해야 했다.
6.25가 터져 38선 이북으로 한국군과 미군이 치고 들어가자 중국은 대군을 파견하였다.이는 북한이 국공내전에서 만주등에서 장제스군과 싸워준 댓가이며 그들 자신의 역사적 학습효과 때문이리라,,,
중국과 일본,소련의 치열한 외교전과 군사적 충돌속에 한반도가 과연 맹수속에 포위되어 있다는 두려움이 든다.
한반도 평화안정은 중국,일본,러시아 안보에 직결되는 균형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