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8

중일전쟁 용,사무라이를 꺾다.-권성욱,미지북스

우리의 식민시대를 공부하다보면 한반도 주변과 세계대전과 부닥치게 된다.

만주국에 관한 인식이 뇌리에서 텅빈것은 많은 만주국 출신(박정희,정일권,백선엽등)이 해방이후 한국정부의 주류로 활동하여 일체 금기사항으로 언급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 실체를 알 수있는건 <나라가 불탄다>라는 모토미아 히로시本宮 ひろ志의 일본 만화이다.

http://dankunjosun.blogspot.kr/2015/04/blog-post.html

전세계가 전쟁통인데 한반도만 오히려 안전지대같은 느낌마저 든다.

간헐적인 투쟁이외에 그 투쟁의 전후배경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없다보니 해방이후의 여러갈래의 대립과 노선갈등도 막연하고 뭔가 저 산너머일이 되어버려 한반도내에서 벌어진 참혹한 6.25의 원인도 오리무중으로 빠져버린다.이 책에서는 국공내전 당시 만주에서 조선인(이후 북한건국주도)이 중공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한국전에서 중공군의 개입에 혈맹의 연을 언급하게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왜 급격한 군국주의가 되었으며,어찌하여 중국은 대국인데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으며 그 가운데 독립지사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협력,투쟁하며 조국독립을 갈망했는지 중일전쟁을 내용을 통해 파편적으로 알던 지식이 하나하나 연결고리를 찾게 해준다.

방만한 자료를 특히 전공자도 아닌 분이 정리했다는데 놀랍다.관련 영화(<일대종사><색계><진주만><1941><도라도라도라><콰이어강의 다리><마이웨이>등)까지 하나하나 전투기기종 영화상 오류,과장까지 다 언급한다.뒤에는 무기목록까지 정리하였다.

영화 <제독의 여인>에서 언뜻들은 적군백군이 어떻게 청산리,봉오동 전투와 간접 연결되며,황태현님의 <지역패권의 나라>,모토미아 히로시本宮 ひろ志<나라가 불탄다>에서 언급된 일본군국주의의 특정지역(죠슈,사쓰마 지역)군벌의 독선적인 행보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잘 나와있다.

<중국의 붉은별>에서 읽으며 간과했던 또는 일방적 주장, 장제스측의 국민군 근대화 노력과 군부의 많은 희생도 잘 묘사되어있으며 백단대전에 대한 중국공산당내 다른 의견도 알게 되어 뭔가 시야가 넓어지고 균형감이 잡히는 느낌이다.

장제스가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외부침략을 방어하는 이중역할에서 악전고투한 흔적을 볼 수 있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거사가 가지는 중국내 역사,정치적 의의도 다시 한번 되새김하게 된다.공산당,국민군,지역군벌 등이 사분오열되어 대일항쟁을 두고각각 자기 이익을 추구하던 중국내부정치싸움의 기폭제가 되었으니 말이다.1945년 연합국에 항복문서에 서명한 외상 시게미쓰는 이날의 폭탄 파편에 다리를 잃어 의족을 하게 되었다.




1932년 상하이 상공에서 중일 공중전이 벌어졌을 때 권기옥 여사가 최초 여류비행사로 참전한 기록은 놀랍다.이후 10년간 복무하며 중화민국 공군중령까지 되었다니,,,,



1936년 일본에서는 2.26사태가 중국에서는 12.12 시안사변이 발발 중국과 일본은 서로 정점으로 치닷는다.중일전쟁은 우발적으로 갑자기 사전준비없이 일어났다.그동안 일본유학파 장교출신인 장제스는 근대화된 일본과 도저히 전면전으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군대를 착착 근대화시키며 준비하였다.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상한 전쟁

외부세력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서로 방관

일본은 총력전 경험의 부재임에도 단기전인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경험이 상황을 오판하게 만듬.만약 두 전쟁이 장기전으로 갔으면 일본은 파산할뻔 했다.천운-일본은 2천6백년이래 패한적이 없었다는 자체논리- 어쩌구 하며 미국과의 전쟁까지 확전.중국이나 미국과의 전쟁도 이때 승리경험으로 초반에 밀어붙이면 양쪽다 항복하고 협상할 것이라고 오판함.

러일전쟁에 관한  쓰시마 해전 <짜르의 마지막 함대>👉

https://dankunjosun.blogspot.com/2018/03/blog-post_31.html

중국에서 일본이 실지로 점령한 것은 자기 병영뿐

장제스는 상하이와 난징의 실패를 교훈삼아 대규모군을 동원해 정면승부하기보다 주력을 보존하며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적자원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공산군이 국민군에 써먹은 수법 일본군에 재탕

소련의 스탈린이 군부숙청으로 장년장교부재가 전쟁초기 독일침공에 무력한 원인이었다면 이후 청년장교의 적극적 투입은 유능한 인재 발굴이었듯이 중국전쟁 초기 많은 장성급인사의 궤멸은 자연세대교체효과를 유발(당시 중국은 농업국 시대 구태 장교가 많아 근대적교육을 받은 청년장교의 투입과 신식무기의 조화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중국에 16개 사단,한국에 1개 사단,본국에 2개 사단을 배치하여 더 이상 착출할 군인이 없었다.일본인은 한국인을 신뢰하지 않아 전쟁 초기 군인징용을 하지 않았음

중국국민군은 참담한 패배속에서도 집단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장제스는 사관학교 출신 답게 무리한 독려를 하지 않고 적절한 타이밍에 후퇴시키는 유연성을 보여 히틀러나 스탈린의 과오인 집단투항사태를 방지했다.

일본군이 자행한 많은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국가나 군인의 이미지 실추, 현지인의 협조 저하,민중반란등을 유발하기에 철저히 금지되는 근대군인교육사항인데 지켜지지 않은건 그만큼 일본군 수준이 오합지졸수준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에 대해 과소평가한 편이 있으나,오히려 일본침략이 장제스의 힘을 저하시키고 자신의 세력이 늘어나는 계기로 삼았다고 여러자료를 통해 증언한다.

백단대전은 100개 연대(단)이 참여한 전투인데 게릴라후방 침투 파괴전략이었으나 자신의 병력손실을 우려해 마오쩌뚱은 이를 비판하였다.현장 군부와 당지도부와의 견해차가 컸고,주더와 펑더화이는 심한 비판을 받았다.

일본이 마오쩌뚱이 있던 옌안을 직접공격하지 않은건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장제스는 현장에서 병사들을 독려했으나 마오쩌뚱은 옌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자 장제스는 소련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할 것으로 기대
1941년 노몬한 전투로 일본과 소련이 충돌후 일소중립조약을 맺어 일본은 동남아를 침공하며 원자재지원을 받고 소련은 70만에 이르는 병력을 독일전에 투입했다.

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이 쳐들어가 자원과 식량을 빼앗아감

김산의 죽음에 대해서도 강의실에서 체포되어 즉결처분된 일화를 소개한다.

공중전에서 중국군이 선전하고 소련지도부의 지원(대리전)과 훈련으로 막상막하까지 갔으나, 일본 제로전투기 등장과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군이 퇴각하며 심각한 열세를 보이며 무차별 폭격하에 장제스 첫아내도 사망

일본이 북부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자 영국과 미국이 중국을 지원하기 시작.플라잉타이거부대(비호대 飛虎隊)의 미군교관 셔놀트는 매춘부까지 운영하며 자유분방하게 융통성있게 부대를 운영하여 선방함

진주만 기습은 미국에 큰 피해를 주지않았다,일본군이 철수에 급급해 항만시설과 유류시설을 파괴하지 않았고 격침된 태평양함대의 8척의 전함도 수심이 얕아 두세달뒤 모두 수리되어 복귀하였다.

중일전쟁당시 독일은 텅스텐등 전쟁물자확보를 위해 중국을 지원했고 미국역시 자국경제에 도움이 되기때문에 일본에 석유등 물자를 판매했다.전쟁이 치닫으며 미국으로부터 석유공급이 중단되자 일본은 당황했으며,자원확보를 위해 동남아로 눈을 돌린다.

일본해군은 육군과의 자존심대결로 미해군과의 전면전이 불가하다는 자체판단을 하고서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미국이 참전한이후에도 중국은 별 대우를 못받았다.유럽전선을 우선시했으며 당면한 태평양전쟁 그리고 뿌리깊은 인종차별적 사고가 문제였다.

일본은 독일과 연대했으나 전쟁중에 딱히 연대효과를 보지 못했건 일본 외교의 오판이었다.두나라간 거리상 문제도 있었지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당시에도 일본에 정보를 주지않았다.


임시정부에 우호적인 중국에 서양열강은 한반도지배야욕이 아닌가 의심했다.
임정과 조선의용군과의 좌우합작 진공작전은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2차대전 당시 영국내 폴란드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폴란드내 공산당원으로 폴란드정부를 수립한 소련의 전례때문에 임시정부의 법통문제가 미국의 심각한 고민꺼리였고, 인도독립문제와 연계되기를 영국은 우려했다.

일본의 갑자스런 항복은 총력전으로 많은 걸 잃은 중국에겐 허탈한 것이었고 아직도 자국내 잔류한 1백만 일본군 문제로 미완상태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하는 문제가 되었다.독일수도까지 밀고 나가 의사당에 소련기를 꽂은 선례가 중국이 생각하는 전쟁종결의 모습이었으나 나름 중국인에겐 날벼락이었다.

미군의 한반도 상륙계획은 국토의 70%가 산악지대라 장기적으로 방어군에 유리하고 한반도 일본 양쪽 공격이 효율성이 떨어져 배제되었다.

만약에 한,중연합군이 일본본토에 상륙작전을 하여 일본왕궁성등 주요기관을  점령했더라면 하는 역사의 아쉬움이 짖게 남는다,,

8.15연설에서 장제스는 일본의 원조로 중공군을 제압할 구상을 한다.
종전후 국공배전으로 인해 친일부역자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권력층진입은 철저히 배제하였다.

중국점령군이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국공내전으로 철군

일본을 독일처럼 분할 점령하려는 JWPC-385계획이 맥아더의 강력반대로 무산


영화 <강철비>에서 잠깐 언급..

국공내전당시 만주등에서 중공군을 지원한 조선인들은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 남침핵심요인 됨.이후 중공군의 개입도 이때의 인연이 원인이 됨.인천상륙작전으로 세계이목이 집중되자 중공은 티베트 침략

국공내전 당시 미국의 이중성은 양쪽에서 모두 실패

공산화를 막으면서 강력한 중국의 탄생도 두려워한 미국의 이중정책은 양쪽 모두의 신뢰만 상실함.미국의 장제스에 대한 군사지원은 2류물품 위주였음

소련의 급부상으로 농업국가로 일본을 전락시키려던 초기 전략은 대폭 수정되어 일본의 신속한 부흥으로 바뀌었고 국공내전으로 타위완으로 밀린 장제스는 국제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과의 강화조약에 저자세로 임했다.오히려 패전국 일본이 큰소리치는 형국이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관계개선을 나선 미국과 소련과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고립을 타파하려는 중국의 저우런라이는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선언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포기.정권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중국 민중의 열망을 외면

일본은 가해자로서 침략에 대한 사죄와 보상이 아니라 경제원조 명목으로 아시아국가에 수혜를 베푼다고 생각



당과 신라가 백제,왜 연합을 격파하고 고구려까지 멸망시키자 왜는 해안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방어성을 세웠다.

몽고가 고려를 복속시키다 여몽연합군이 두차례나 일본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이 원병을 보냈다.

한반도가 일의 식민지가 되자 중국은 본토에서 일본군과 8년간 치열한 공방전을 해야 했다.

6.25가 터져 38선 이북으로 한국군과 미군이 치고 들어가자 중국은 대군을 파견하였다.이는 북한이 국공내전에서 만주등에서 장제스군과 싸워준 댓가이며 그들 자신의 역사적 학습효과 때문이리라,,,

중국과 일본,소련의 치열한 외교전과 군사적 충돌속에 한반도가 과연 맹수속에 포위되어 있다는 두려움이 든다.

한반도 평화안정은  중국,일본,러시아 안보에 직결되는 균형추이다.

Sunday, March 25, 2018

영화 <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On the Beach at Nighr Alone >-홍상수 감독의 보여주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한 여운

홍상수 감독의 텅빈 느낌과 여운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듯한 영화를 좋아한다.

이번에는 배우 김민희와 관련된 개인이야기에 대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제목은 휴트먼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늘 그렇듯 홍상수 영화는 시작인지 끝인지 계속 이야기가 이어지는지 감이 안오다.

소소한 이야기와 화려한 배우의 평범한 일상이 오히려 낯설어 보인다.

청소년관람불가인데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독일인듯한데 별로 외국같지 않다.

서울의 어디같다.

원해서 결혼하는 것과 필요해서 결혼하는 것은 어떻게 다르고 그 기준은 무엇일까?

강릉같은데도 을왕리 같다.

어디간 외국에 나가 있어도 마음은 서울에 있다는 암시인가?

수수한 김민희 모습

정재영,권해효,문성근의 일상적인 연기

약간의 코믹

송선미의 세련미가 홍상수영화에서도 수수하게 나오지만 빛난다.

수줍고 방어적이만 술자리에서는 공격적인 독설을 뿜어내는 모습에 긴장감이 팽팽해진다.

사랑자격운운도 그렇고 할일이 없어 남얘기나 하다는 중 얘기가 문득문득 날 돌아보게한다.

독서로 소일하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의욕과 책과 싸우듯이 진지하게 책을 읽어야한다는 독서법도 그런가 싶다.

독일해변의 마지막 장면과 강릉해변의 마지막 장면이 연관성이 있는건가?

아니면 술자리에서 얘기한 몇번의 만남중 한사람인가?

모르겠다,,,감독님의 깊은 뜻을,,,


이분은 정체가 무엇이고 의도가 있는 것인지 가장 궁금하다,,,

Saturday, March 24, 2018

책 리뷰-<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 고운기 / 현암사 > -제왕帝王의 출현이 상민常民과 같겠느냐




임진왜란 당시 퇴각하는 왜군이 도쿠가와이에야스에게 진상품으로 바쳐진 중종(1512)경주에서 발간한 책이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통일후 칼을 묻고 권세가의 뽀대용으로 일본에서 귀중히 보관되며 읽히다 도쿄대에서 발간되고 (1904) 이를 유학가서 본 최남선이 부랴부랴 급거 귀국하여 1927년 경주본이 발간된 415년만에 재출간한다.

일본에서 고이고이 특권 지식인들만 읽어본 이유는 단군신화부분때문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일연이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준비할때 쓴 삼국유사는 당대 유학자인 이승휴와 친분은 있었으나 같은 사건을 다르게 <제왕운기>에 기록하게 되었다.이유는 합리성과 중국사관에 빠진 유학자의 사유때문이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단군에 대한 기록때문에 선비들이 두루 읽었으나 직접언급을 자제하고 옮기기는 하나 에둘러 표현하여 말이 안된다.얼마나 말이 안되냐 하면 식으로 꼼꼼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우회기록의 역사가 이어진다.

나름 자주의식을 보여준다.

안정복이 본 삼국유사,그의 주석이 달린 삼국유사가 일본에 전해져 1925년 교토대학에서 간행까지 되었다니,,

정약용또한 뜯어진 책을 읽어 5권에 적힌 저자이름이 없는낡은 5권째책을  봐 저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적었단다.

지은이의 치밀한 자료조사(단종1452년때 상소문에 기록에 단군기록 언급)와 일본 근대사의 흐름을 세세히 적고 있어 일본근대사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페리제독의 침략을 네덜란드 정보통을 통해 미리 인지하고 대비한 것이 두나라의 운명을 가르게 된게 내심 두고두고 아쉽다.유학자와 군부가 받아들인 명분과 실용의 융통성 차이도 아쉽다.

허수아비인줄 알았던 일왕이 일본은 신의 나라神國라고 버틴 명분도 재미있다.

1682년 조선통신사로 건너간 일행과 일인의 단군에 관한 대화까지 찾아낸 것이 놀랍다.
임진왜란이후 조선뿐 아니라 우리서적을 탐독한 일인까지 단군에 대해 알고 있는 증거가 될듯하다.

일본왕보다 더 앞선 단군신화를 두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 지식인의 억측이 드러난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상소문까지 인용하는 자료정리가 놀랍다.

과거의 인물들이 옆에서 대화하는 듯 생생한 글쓰기도 흥미를 유발한다.

때로는 유쾌하고 때때로는 진지하게 자기전 머리맡에 두고 읽어왔다.

읽기는 공공도서관에서 읽었는데 나중 구입하여 다시 재독하다.

단군에 대한 기록에 대한 조선유학자들과 일본 지식인의 고뇌를 잘 정리한 것은 좋은데
과연 단군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책에서 잠깐 언급한 파른본 삼국유사
http://dankunjosun.blogspot.kr/2018/03/blog-post_17.html

인각사와 삼국유사전
http://dankunjosun.blogspot.kr/2013/12/ingaksa-temple-and-samgukyusa.html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 ALBERTO GIACOMETTI


오래전부터 보아왔는데 뭔가 싶어 보지않았다.
 피카소가 시기한 작가라는 문구가 뭔가 피카소와 관련된 거물이라는 생각을 들게함


 학생들이 단체로 몰려들며 뭔가 좀 있겠다 싶음
 국민일보 창간 30주년 어쩌구 그러면서 조용기목사 부자의 비리가 생각나 기분이 잡치기 시작


설명해주시는 분이 도슨트:김창용님 같은데 귀로는 듣고 눈으로 혼자 관람해서 다 듣지는 못했지만 재미있고 유익한 설명이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ns114&logNo=221218485373&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같이 따라다니는 관람객이 너무 많아 관람에 방해받고 싶지 않아 좀 떨어져 다녔다.
 청동
 석고원본 3000억 상당,,,

 작가가 일본인 철학자 야나이하라 이사쿠와의 교류로 동양사상에 심취했다고 하여 이런 명상하는 스님상이 나온듯,,,로타르Ⅲ

야나이하라 이사쿠가 사르트르의 철학을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하는등의 활동으로 자코메티와도 교류하게 하고 그의 아내에게 기모도도 선물한듯하다.

만약 한국인 동양학자와 교류했다면 또 다른 감각의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내심 아쉽다.

일본이 아시아의 교두보가 되기 위해 문호를 개방한 역사적 결단이 여러방면에서 큰 차이를 만들게 되었다.





 안에서 명상 풍경음악이 나오고 조용히 명상할 수 있는 좌석도 있음

석고 원본이고 아시아 최초이고 프랑스 같으면 방탄유리로 칸막이를 쳐놓는다함
 자기의 남은 시간을 정처없이 걷는거라는 것인데 잘모르겠다.3000억정도의 가격이라함


 이쪽에서 보면 뭔가 날카로워 보이고



 여기서 보면 미소 뛴 처연한 얼굴인데...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성불구라 자식이 없는 가계사

피카소와의 인연

모델,아내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설명해주시는 분이 사후 아내가 조그만 아파트에서 검소하게 전기를 집필하며 막대한 재산으로 재단을 만들어 살았다 하니 에르메스 핸드백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남편을 빵으로 보낸 분과 격이 틀려 보여 좋다.

1839년? 사진기가 나오면서 화가들이 사물의 내면을 표현하기 심취했다는 설명은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모딜리아니는 그래서 그릴 수 없는 여인의 내면을 상징하는  눈을 안그린게 명품이 되었고,
마리 로랑생이 샤넬과의 의견차를 보인 것도 내면를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샤넬이 몰라봤기 때문이리라,,,http://dankunjosun.blogspot.kr/2018/02/marie-laurencin.html

인물의 기운,氣를 표현하려 한게 아닌가 싶다.그리면서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번지는 효과를 반복한 것도 마찬가지 의도가 아닌가 싶다.



난해하게 읽었던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의 무대감독도 하였다 한다.
연세대 경영대 벽에 새겨진 문구

사르트르와도 절친이었다하니 당대 거물들은 다 아는사이,,,


자코메티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파이널 포트레이트>가 영화화 되어 개봉예정이라고 한다.알베르토역은 제프리 러쉬..기대된다.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9957



예전 마당 고양이는 덤,,

집에 있는 책

Monday, March 19, 2018

여의도 C-47수송기와 광복군,김구


국군의 날 행사 퍼레이드줄 알고 늘 무심히 지나감

지인이 김구선생과 임정일행이 해방후 타고 온 비행기라하여 가봄



여의도에 착륙한 c-47수송기를 포위한 잔류 일본군
착검하고 일본도든 일본군과 일전불사를 앞둔 미군과 광복군일행
우여곡절 끝에 항복의사로 무릎끓고 술을 따르는 일본장교

이범석<우둥불>에서 사진은 1945.8.18이후 19일 연료보급을 위해 중국 산동성 일군 점령지에 불시착한 사진이 있다.

이사진만으로 조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지만 이사진은 상해에서 출발당시 사진이고 조국에 도착했을때는 허허벌판에 아무도 환대해주지 않았다.국민들은 당시 임시정부존재 자체에 대한 정보조차 없었고, 김대중 자서전에서도 해방이후 임정에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관련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136933










영화 < 이누가미 일족 (1976) > -옛날 영화인데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일본대사관의 홍보 메일을 받아 확인해 보니 상암동 영상자료원에서 하고 있었다. 예약을 못 하고 현장 발권했는데 예약만 하고 오지 않으신 분들이 많아서 빈자리가 많았다. 카토카와회사의 상징인 봉황이 나오는데 고구려 봉황과 비슷하다. 1950년 요쿄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