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승가사 僧伽寺Seunggasa②
감사원시주문제로 검찰조사문제가 불거졌고,울동네 공사하시는 분이 과거승가사개축문제를 잘해결하여 큰돈을 벌었다한다.당시 교통이 미비해 건축자체가 불가능했다한다.
지금은 봉고차가 다닌다.
하지만 신라시대는 어떻게 사람이 다니고 절을 지었을까?
지금보다 규모는 크지 않았으리라,,,
조용헌샘 사찰기행에 보면 불사건립에 관해 주지스님(상윤 스님)의 공력에 대해 나온다.
보현봉 자락이 임신한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형상이라는데 그래서 비구니만 견딜수 있다는데 어디가 그렇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언제가 갔을때 한 스님이 여의도 불꽃축제로 절에서도 푹죽소음으로 많이 놀라신듯
어제 무엇을 도심에서 했냐고 물으셨다,,
김신조도 여기로 넘어오고 기록에 의하면 최초논쟁은 있지만 김정희도 여기서 머물다 진흥왕순수비를 해석했다한다. 이곳저곳에 김정희 글씨가 남아있다,,
저 놓은곳에 비를 세우고 신라가 본격적으로 중국과 교역하며 삼국경쟁의 치열한 투쟁을 하는 시점 진흥왕은 저기 올라 야심을 불태웠을 것이고 민초는 저비를 만드느라 어마어마한 노역에 시달렸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러 갈때도 1단계로 이곳부터 점령하였다 한다.
저 길도 없는 저곳을 등산화도 없이 어찌 올랐을까?
문득 떠오른 것인데 승가사탑이 고려시대 경천사 십층탑과 조선 시대 원각사지 십층탑을 참고한듯하다,,
한때 과도한 세불리기 공사라고 격하게 비판했지만 찬찬히 보니 나름 고심한 흔적이 있다.
고려,조선시대 저정도 탑이면 멀리서도 보이고 위세가 상당하였으리라,,,
경천사10층탑->원각사 10층탑->승가사탑
문득 떠오른 것인데 승가사탑이 고려시대 경천사 십층탑과 조선 시대 원각사지 십층탑을 참고한듯하다,,
한때 과도한 세불리기 공사라고 격하게 비판했지만 찬찬히 보니 나름 고심한 흔적이 있다.
고려,조선시대 저정도 탑이면 멀리서도 보이고 위세가 상당하였으리라,,,
경천사10층탑->원각사 10층탑->승가사탑
http://dankunjosun.blogspot.kr/2016/06/pensive-bodhisattvasnational-treasur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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