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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에 있는 이한열기념관에 가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안내를 해주신 분은 문영미님 같다.
(문익환 목사님의 동생이신 문동한 목사님 따님이시며 동화작가이시다.
그러니깐 배우 문성근님의 사촌이시다.)
신촌에 이한열기념관이 있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옆에 숨어있는 책방도 자주가고..그 옆에서 술도 먹어봤는데..
몰랐다...
진짜...
방문객이 별로 없다는 기사를 검색으로 알게되어 씁쓸한 마음이다.
하기사 연세대 내 걸개그림 초상화까지 훼손되는 세태에서 무얼 바라랴..
6.10 민주화운동은 처음으로 우리가 뭉치면 쟁취할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는 기쁨을 피부로 느끼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 기폭제가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직격 사망사건이다.
1987년 4월부터 고등학교에서는 간간히 방과후 돌아 다니지 말라 했고,
야간자율학습 땡땡이도 눈감아줬다.
수업후 거리로 나오면 차도에 버스는 없었다.
교복, 두발 자유화로 인해 전경들이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구분할 수 없어
구타당하는 피해사례가 간간 있었다.
가방검사시 수학정석이 나오면 무사통과...ㅜㅜ
무더위 속에 전경 전투복의 땀냄새와 최루탄 냄새는 초췌한 사람의 첫 모습을 떠올리게했다.
지금 CGV신촌 아트레온 골목에서 화염병과 돌을 든 대학생과 전경이 일촉즉발상황이었고...
대규모시위 앞에 그날만은 전경이 소규모그룹으로 다녔다.
창천동삼거리에서 홍대생이 쏟아져 나와
신촌로타리와 동교동삼거리 앞에서 전경이 횡대로 쪼여오고 있었다.
6.29의 감격도 잠시 대선은 패배했고..
강경대 열사로 인한 분신정국,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
3당합당
김영삼당선
정권교체
노무현당선
이명박당선
박근혜당선...
국정원 대선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문제도 지지부진 흐지부지되고 있다.
집권한 민주화세력은 왜 정권재창조를 하지 못했을까?
이한열 형이 그때 죽지않았으면 지금쯤 무얼하고 있을까?
아이들 학원비 대느라 쩔쩔매며 살까? 아니면 기러기 아빠?
회사 중역으로 명퇴를 걱정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
아니면 정치인이 되었을까?
한열형이 영화화 된다면 배우 김정현이 하지 않을까?
한열형이 최루탄을 피했다면, 6.10항쟁은 탄력을 받지 못하고 실패했을까?
박물관에는 올라가는 계단 옆에 이성호기자의 발뉴스가 있고,
안에 영상슬라이드에서는
문익환목사의 장례식당일 민주화로 희생당한 분들을 호명하는 명연설이 나온다.
사진,,,유품...당시 유행했던 깨진 잠자리 안경.
시위당일 신었던 신발은 삭아서 부식되었다. 참 신기하다 운동화가 삭다니..
이한열 열사의 피격사진이 담긴 교과서가 있다.
이젠 교과서에도 실리는구나.
상암동에는 박정희 기념관이 묵직하게 버티고 있고 도서관전환약속도 어기고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012227255&code=950201
집권은 고사하고 일베니 어버이연합이니 그당시 강렬한 인생의 전기를 맞이했던 많은 사람들이 외면받고, 생활에서 조차 반대방향으로 역주행하고 있다.
모든건 사이클이 있다고 본다.
동구권 붕괴로 레닌동상이 끌려 나왔지만 신자유주의의 병폐로 장기불황에 빠지자
맑스가 옳았다는 평가와 함께 그의 저작을 다시 탐독하는 시대다.
부시가 재집권하며 전쟁으로 미국을 구렁텅이로 몰고갔지만, 그것이 오히려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한열 형의 죽음으로 당시 슬픔과 분노와 감격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한뜻으로 더욱 성장하여 다시 어깨걸고 모이리라 믿는다.
최병수님의 작품
이한열 열사의 걸개그림으로 유명한 분이시다.
한 외국인이 위 솟대사진에 대해 물어 떠듬떠듬 설명을 하다보니
가슴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25년전이지만 수많은 기억중에서 아주 강렬한 감동을 준 사건이기 때문이리라...
연세대에 있는 이한열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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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세대학교가 새 단장을 하며 이한열기념비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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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세대학교 교문 앞 사고 발생 장소에 동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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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정리하다 발견한 1987.6.10 당시 동아일보
당시에도 이한열사건이나 6.10이 꽤 큰 사회이슈여서
담임선생님도 방과후 빠른 귀가를 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아직까지 보관했던 것 같다.
대학원재학중에 알바 강의를 하시던 샘이
수업중 처음으로 연세대학생이 시위중 다쳐서
병원에 실려갔다고 울분을 토하던 말씀을
간접적으로 옆반아이한테 들었나 수업중 들었나 했다.
며칠후 연세의료원 앞 찻길에 연좌한 수많은 인파 때문에
버스가 못다녀 걸어서 집에 갔던 것 같다...
이 글을 처음 쓸때만 해도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해 직무정지를 당했다.
그를 몰아낸 것은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 수백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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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벌써 30년이 흘렀구나,,
30년만에 결국 몰아냈구나,,,
하지만 아직도 이런 분들도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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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영화 <1987>으로 다시 이슈화가 되었다.1987>
새로운 동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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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광주 5.18구묘지를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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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9 당시 흥분한 시위대가 포위된 전경을 무장해제해서 분수대 안에 들어 가게 했다.
지금은 분수대 공사가 한창이다. 가까운 신세계 백화점 본점은 명품 외국인 전용(?) 매장이 되어 버렸다.
한국전 당시 중공군과 우리는 유혈 전쟁을 했다. 하지만 국교 정상화 이후 대만과의 관계는 냉랭해지고 90년대 한국 경제 저성장에서 중국산 저가상품이 큰 역할을 하였다.
특이한 것은 남북정상회담 당시 동서독의 예를 들어 북측의 전쟁책임 사과와 포로교환문제를 못 한 것을 비난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 당시 어떤 태도를 보이셨는지 모르겠다. 내 기억으로 중국이 한국전 참전에 대해 딱히 공식적 사과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또한 북측의 강경 노선의 배경은 여전히 중국의 뒷배가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한국전 참전이 대만침공을 유예하게 하였고 지금은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한 대만 침공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도상 가까운 나라가 문화대혁명을 할 때 우리는 고도성장을 했고 중국이 등소평이후 자본주의 경제 논리를 받아 들여 치고 나오자, 침체를 겪던 우리는 반도체와 정보화 산업으로 체질 개선을 했다. 중국과의 무역흑자가 한국 경제의 필수 요소가 되었고 웹툰이나 K-pop, 영화, 드라마에 있어서 중국 시장은 한국이 놓칠 수 없는 큰 고객이다. 신세계 백화점의 큰 손 중국 손님의 구매력이 어마어마하다고 관계자는 말한다. 실시간 스마트폰으로 라이브로 주문 구매한다고 한다.
민주화의 성지에서 변화하는 주변 정세를 생각해 보았다.
2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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