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영규스님 진영을 보았다. 예전 김성한 소설 <임진왜란>에서 체격이 장대했다고 서술한 기억이 났다. 박물관 설명도 일치한다.
과거 MBC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에서 임진왜란부분에서 잠깐 조헌이 전사하는 것 영규스님이 몇명 이끌고 숲으로 뛰어 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것에 대한 전후 세밀한 상황을 잘 알 수 없었다.
나무위키를 검색하며 조헌은 강경파 유생이지 전략적 군인이 아니며 영규 스님이 오히려 병법에 근거한 전략적인 유연성이 있는 전쟁 접근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시에 당시 인구비례로 보면 1500여명의 의병은 가벼이 써서는 안 되는 병력이다. 이전의 1차 금산전투(1592.7)에서 고경명이 6천 의병을 잃은 것도 치명적이었다. 적의 수장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장수 코바야카타 타카카게였다. (1593.2.27 평양전투에 승리한 명나라군을 벽제전투에서 격파했다.)
"왕이 수모를 당했으니 신하가 죽어 마땅하고 이해관계나 승패를 따질 바 아니라"며 직선 돌격해서 분전할 것을 독려한 선비 마인드의 한계는 구한말 서구 문물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조선(문인)과 일본(군인)의 사고방식에서 똑같이 드러난다. 동시대 이순신이 군인으로서 치고 빠지며 병력손실을 최소화하며 전략적 행동을 하여 전승을 한 사례는 생각해 볼 만하다.
전봉준이 우금치전투에서 각개전투나 시기조절, 김개남과의 조율을 하지 않고 정면승부하다 궤멸된 상황과도 겹쳐 보인다.
고경명은 장원급제 출신이고 조헌 율곡의 수제자로 성균관을 거친 유생 엘리트고 전봉준도 농민이지만 서당 훈장 정도는 하신 분이다,,,
영규스님은 의리를 택해 사지로 800여 명의 승병을 이끌고 가서 2차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조헌을 따르는 의병이 수급을 상투로 파악해 700 의총이 되었고 스님의 수습은 열외가 되어 사실은 1500 의총이 맞다는 견해가 있다.
전쟁 중에도 의리를 지킨 스님들의 죽음은 천시한 것일까?
전투 중 부상을 당해 드러난 창자를 잡고 60리를 걸어 공주 포천천을 지나는 모습을 그려봤다.
죽은 사람은 죽지 않고 끊임없이 산자와 대화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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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샘의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2019/통나무>에서는 조선시대 스님이 산속 암자에서 맹수를 방어하기 위한 무예와 단체생활로 인한 엄격한 규율, 선 수행으로 영적으로 뛰어난 정신수양이 국난에서 군사조직화하기 적합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유생들의 질시로 업적이 많이 누락되어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https://dankunjosun.blogspot.com/2022/01/blog-post.html
서산대사가 입적시 쓴 적멸송은 국립중앙박물관 영상으로 복원되었다.
"80년 전에는 내가 나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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