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29, 2021

영화 <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분단은 왜 극복되어야만 하는가?



 


영화<박치기>를 보면서 일본내 조선학교에 대해 알게 된 듯하고 몽당연필을 통해 꾸준히 소식을 들은 듯하다.영화 박치기의 제작자 이봉우님이 교토 조선고급학교 출신이다.👉https://dankunjosun.blogspot.com/2018/04/we-shall-overcome-someday-2004.html

해방후 일본에 있는 한국인은 북한이나 남한 귀국 또는 일본 귀화 또는 재일조선인으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약 60만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영화<피와 뼈>에서 그 분들의 삶을 어느 정도 보았고, 그외 사할린이나 소련의 강제이주로 고려인으로 카자흐스탄 같은 곳에 사시는 분들도 많다고 알고 있다.

영화<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https://dankunjosun.blogspot.com/2019/08/13.html에서는 그에 대해 다룬 이야기다.

윤후명의 소설<하얀배>https://dankunjosun.blogspot.com/2017/07/blog-post_25.html는 제3세대 이야기다.

"분노는 하지만 증오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쉽게 나올 수 없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 준다.

분단의 문제가 일본에 있는 재일한국인에게 어떻게  받아 들여지고 실제적으로 어떤 문제를 가져다 주는지 깊이 고민하고 자신을 돌아 보게 만들었다.

다음은 김철민 감독님과의 관객과의 대화내용

영화 내용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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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DMZ영화제 수상이력 소개

박인희 감독님 일본 상영 제안

코로나19로 자가격리, 비자 중단 등 절차적 문제가 많이 번거러웠다.

그러다 재판에서 패소한 소식을 듣고 일본 11개 지역에서 상영 소식 듣다.

동포들의 지지가 많았다.

공동체 상영 제안(전교조)이 들어 왔으나 코로나 19로 상영이 취소되었다.

일본 현지에서 동포나 시민들의 관람 상황을 느끼는 것은 온도차가 좀 있었다.

격리중이라 2번 정도 상영관에 못갔다.

재일동포분들의 상영중 숨소리나 분노하는 모습, 눈빛을 보면 마음이 무거웠다.

한 할머니께서 "조선 사람으로 살아서 좋았다"고 손을 잡으시며 용돈(?)을 주셨다.

일본 코로나 상황에서 일본인 주축 상영회에서 일본인 아니 한국인이 봐야 할 영화라는 논쟁이 있었다.

관객질문1> 극중 제작진 중 3인? 2인? 인데 정확히 누구 누구인가?

답> 최아람? 촬영은 정원섭, 프로듀서 1인, 엔딩곡 노래 음악 백자


관객질문2>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무엇입니까? (어린 소녀 질문)




답> 제작 기간이 좀 길어서 추억과 편집할 때가 좀 다르다. 2002년 금강산 장면도 기억나고, 학교 폐쇄 사건, 김선아라는 금강산 가극단 연주단과 뒷풀이 후 맥주 먹던 기억 등이 난다.

김남구 할머니, 서연수 할머니, 재일동포 피해자 모임, 간첩단 조작 사건 관련 자료는 자료 정리 중 부담이 많이 되었다.

관객 질문3> 저는 우토로 마을을 무한 도전에서 보았습니다. 현재 돌아가신 분도 있지 않나요?

답> 

인연과 인연으로 만나고 어르신들과 시설을 돌며 인터뷰를 하는 것들이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초반은 어린 시절이라 기억을 못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6.15 공동선언으로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생전에 통일을 보지 못하셨다.

강겸남 할머니는 무한 도전 훨씬 전에 뵈었고(?) 김수한님은 건강하시고 유쾌하셨는데 이제 고인이 되셨다.

우토로 마을 기념관을 짓고 있다.


관객 질문4> 인터뷰 중 항의나 거부, 호의적인 분위기가 있었나요?


 답> 인연과 인연, 만남과 만남으로 작업을 하였다. 간첩조작사건은 인터뷰에 부담을 느끼거나 영화로 나가는 것에 불편해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민단과는 잘 되지 않았다. 인터뷰 내용이나 영화 내용상 부적절해 보였다.

관객 질문5> 제작 과정에서 크게 자신을 변화시킨 일들은 무엇일까요? 관객들이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보기를 바라는 부분이 있나요?

답>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분노하지만 증오하지 않는 삶"이라든가 통일, 편안한 삶이 아니 다른 방향을 선택했던 것, 도쿄 공습 당시 학생신분이셨던 분, 분단 문제,,

관객 질문6> 조선인학교에서 운동회 때 발달 장애인학생을 도와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학생은 지금쯤 졸업후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텐데 근황을 알고 있나? 거기 나오는 교장선생님은 어떠신가?

답> 아마도 영화촬영 후 10년도 더 교직생활을 하셨다. 제작과정 중 그 분의 제자분들을 만났는데 백두산 등반 중 버스가 고장났을 때 걸어 오른 적이 있었는데 선두에서 가셨다고 들었다.

발달 장애인 학생 근황은 잘 모른다.

관객 질문7> 차기작은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나?

답>다큐창작소라는 유튜브 활동을 했다.

이 영화가 힘을 갖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관심을 갖고 호응해 주셔야 한다. 아마도 연말에 개봉을 하면 영화에  출연한 3인이 한국에 오실 듯하다. 그분들이 관객과의 대화를 하실 것이다. 한국에 오시고 싶어 하신다.


권해효님

이분들께  김근태상으로 상금 후원하였다. 우토로 박물관이 건립 직전이다.


Wednesday, June 23, 2021

김민기 아침이슬 50년전을 둘러 보고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심장이 쿵 울리는 글귀다.





                          👉이 화  아침이슬


                           👉이태호 화백

                           👉아마도 인사동서 찍은 것인데 원본(?)을 보다.











그림 한 장에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호철 지하철 1호선의 기억


👉임 옥상 신문-땅굴




노래 때문에 더 알려지고 연극연출로 더 유명해졌지만,
 원래는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서울대 음대에 재학한 누나 덕에 음악에 눈을 떠서 
클래식기타를 독학으로 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지만 별로 흥미를 못느끼고 
연주에 열중한 그가 시대의 아이콘이 될 줄 
그 당시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아버지가 의사셨는데 공산군에 돌아가시고 
아마도 간호사인 어머니가 10남매?를 낳으셔서 
김민기는 유복자로 태어난다.

하지만 그는 작품 어디에서 공산당을 원망하는 
이야기는 없다.

그의 자신의 불행을 시대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 당시 시대가 
그를 민중가수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같으면 
"이날치"가 되었으라나


👉홍성담-야간 작업 2









전시회에 아침이슬이 울려 퍼지는데 감회가 새롭다.

전시장에 흘러나오는 여러 버전의 아침이슬이 상록수와 더불어 언젠가는 국가로 논의될 날을 내가 볼 수 있을까?

친필로 쓴 편지에는 "구속 수감" 등의 당시 살벌한 상황이 적혀 있는데 나름대로 글씨도 잘 쓰신분이시다.

김민기 샘에 대해서는 강헌샘의 <한국의 대중문화사 1, 2 >나 정혜신샘의 사람 vs. 사람 (개마고원)에서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주변 운동권 동지들이 정치적 발언이나 야심으로 패가망신한 경우가 많은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처신의 문제도 모범이 되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김민기라는 이름만으로 금기시 되던 시대에서 민중가요의 대부로, 띤따라라고 천시받던 영역에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활동규제로 인해 광부로 농부로 공장으로 다니던 일들이 하나하나 예술로 승화시켜 민중의 대변자로 거듭나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음미해 볼 귀중한 시간이었다.




영화 < 이누가미 일족 (1976) > -옛날 영화인데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일본대사관의 홍보 메일을 받아 확인해 보니 상암동 영상자료원에서 하고 있었다. 예약을 못 하고 현장 발권했는데 예약만 하고 오지 않으신 분들이 많아서 빈자리가 많았다. 카토카와회사의 상징인 봉황이 나오는데 고구려 봉황과 비슷하다. 1950년 요쿄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