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샘 강의(조선항쟁사-용담의 새벽;2005.8.10)☞
http://dankunjosun.blogspot.kr/2008/11/2.html
<전봉준,혁명의 기록>생각정원, 이이화, 2014
이이화 선생님 작이다. 여러 신문 칼럼과 인터뷰를 통해 이이화샘이 동학에 관해 해박하시다는 건다 아는 사실이고,우연히 도서 할인행사에서 서서 읽다가 도서관에서 빌려보려다 실패하고(검색하면 대출가능한데 책꽂이에는 왜 없냐?) 그러다 결국 구매
주목받는것은 전봉준 공초와 그의 교수형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원본이 있고 그러므로 꽤 오래동안 존재사실 및 연구가 이루어졌을 터인데 나는 형법수업이나 형사소송법 강의중 존재사실조차 몰랐다.
현행 형법1조에 구법과 신법의 적용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바, 그의 봉기동안 청일전쟁중 일본이 승리하게 되고 갑오개혁을 성사시켜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광범이 10여년의 망명생활을 접고 급거 귀국하여 사법개혁을 촉진하게 되는데, 그 내용인바 구법인 대전회통으로 재판하고, 형의 집행방법은 신법인 교수형의 최초집행으로 생을 마감하게된다. 음력 4월1일부로 이심제 적용을 받기 직전 음력3월 29일(양력 4월24일) 새벽2시에 기습처형된 일이 결국 형법1조 문제인데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일본에서 그를 구명하기 위해 변호사선임 및 국사법 처리로 일본법적용을 검토한점 또한 주목할만 하다.
이전에 잘못된 사진자료로 효수된 그의 머리가 강렬하게 기억되어 참형된줄 알고 있었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상징이고 현재 전북프로축구단의 자랑스러운 전북인으로 대형 걸개 그림이 붙이는 등 시대의 변화를 겪었지만 그는 여전히 금지어에 해당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천도교에서는 일개짬도 안되는 사제급 접주가 교황급 최시형에 대든것에 못내 괘씸해 했고,의형제를 맺고 공동전선을 추구한 3대 교주 손병희는 이후 그에 대해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한다...
기본적으로 종교집단이었기에 거시적 관점에서 시기상조론을 제기, 미시적 관점의 민중봉기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다. (맑스가 제기한 종교는 마약이다 라는 극단론이 나오게 된다.)
동학농민 내부에서는 여러 노선 갈등으로( 대표적으로 강경파인 김개남과의 갈등)으로 삐걱거렸다 한다...
전태일 분신당시 핵심 동지를 김개남으로 지어낸 것이 흥미롭다.
☞http://dankunjosun.blogspot.kr/2016/03/bust-of-jeon-tae-il.html
기득권 양반층은 동적,비적으로 하극상으로 치부했고, 안중근도 김구등 동학접주를 비하했고 때론 서로 대치했으며, 의병장 임병찬은 김개남을 밀고 해 참형을 당하게 하였다.
신분적 한계차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평등이념을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화파 역시 갑오개혁에서 타도할 하층계급의난동으로 취급했으며, 이후 창간된 <독립신문>등 내용에도 비하하는 내용뿐이다. 그들은 귀족의 편견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30~40만의 희생자가 나오고, 한중일 삼국의 정치지형이 바뀌고, 청일전쟁까지 유발한 이 거대한 태풍의 소용돌이가 만인의 침묵과 외면으로 조용한 강물소리로 흘러흘러 오늘까지 오게 되었다.
전봉준이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읽으며 급진개혁사상에 눈뜨게 되며, 이동할때 삼삼오오三三五五로 모여 지금도 삼삼오오가 전해진다. 전주성함락으로 전주비빕밥을 유행시키며 집강소운영시 어린이와 부녀자에게도 맞절을 하며 러시아혁명보다 20여년 먼저 평등한 세상을 하늘아래 열었던 온건지도자였음을 쉽고 간결하게 손자에게 설명하듯 풀어쓴다.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i352Fhz4RmHjMdNrReRAuLz5wNPx67bhTgAvuTfLSmzuwgb4oLkMB6KmJUmUtIH62bLSi_bvif4A0djF8IDF-2ZhHUIPyCk_3AGoTN-7R5TiUCMoju1X9Z8JqhHY7giZlaXXt2Mz1leip0kQbWrGa9gsZ43PpAUnGqr3NybR6bt9QxotNPmhjH/w640-h640/KakaoTalk_20240118_185509341.jpg)
전주성에서 강경파 김개남(본명 김기범)은 이대로 진군해 한양으로 가자 하였고 신중한 전봉준은 후일기약으로 격돌하였는데 이후 김개남과 전봉준이 사이가 틀어졌다는 기록과 흥선대원군의 개입으로 입막음을 위해 김개남을 현장에서 즉결처분한 기록도 흥미롭다.
(소설 토지의 동학군 김개주가 김개남 장군을 롤모델로 한 사실은 우리가 알아낼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경리 님의 어릴 적 기억으로 김개남장군은 통영의 영웅이었다,,,)
사실과 유언비어도 나름대로 구별하여 설득력있게 서술한다.
그가 포로로 잡혀 동학혁명운동에 대해 잠시나마 입을 연것은 그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위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기술한 부분도 공감이 생긴다.
그의 인간됨이나 전쟁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아쉬운건 현장 사진자료를 돈이 들더라도 칼러로 좀 뽑았으면 하는 것이다.
<신정일의 우리땅 걷기,갑오동학농민혁명답사기,푸른영토>라는 책이 잘되어있다.
여담으로 동학이 본격 세상에 나온 건 김지하가 본인 증조부가 동학과 관련하여 돌아가셔 흔적찾기에 몰입했으며 이를 김용옥에게 암시를 주고,역시 집안일로 관련이 있는 쿠데타 박이 동학혁명이라고 갖다 붙여 농민만 쏙 빼 농민의 계급성을 감추었다가, 쿠데타 전이 같은 성씨라고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하고 교과서에 실리게 되는 나름대로 공헌을 했다고 한다.
(쿠데타 전은 완산 전씨,전봉준은 천안 전씨라는 주장이 있다.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16/2016051600426.html)
이승만은 해외유학파이지만 같은 전주이씨 먼 친척 이기붕을 끼고 돌았고, 쿠데파박과 쿠데타 전도 자기 업적과는 반대되는 인물인데 대대적인 지원을 한걸 보면 우리나라사람은 아직도 근원에 있어서 단절되지 못하고 있다 봐야겠다.
<녹두 전봉준 평전>시대의 창, 김삼웅, 2009
김상웅 샘의 화려한 지식을 망라하며 관련자료들을 총망라하여 좌우로 찔러 대며 서술한다.
뒤의 부록(공초, 판결문, 혁명일지,연보)도 훌륭하고, 색인 또한 보통 성의가 아니다.
위책과 같은 내용인데 와꾸가 꽉차게 기술하셨다.
두분의 성격차이나 이력을 책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주요내용을 소목차를 달아 찾기 쉽고 읽기 쉽게 서술하셨다.
많은 인용과 싯구가 가슴을 파고 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차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선 사람이여"
"나는 조국의 밝은 새벽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밝은 세상사람들은
2023년 천도교신문에서는 여전히 폐정개혁안을 인정하고 있다.
(소설 토지의 동학군 김개주가 김개남 장군을 롤모델로 한 사실은 우리가 알아낼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경리 님의 어릴 적 기억으로 김개남장군은 통영의 영웅이었다,,,)
사실과 유언비어도 나름대로 구별하여 설득력있게 서술한다.
그가 포로로 잡혀 동학혁명운동에 대해 잠시나마 입을 연것은 그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위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기술한 부분도 공감이 생긴다.
그의 인간됨이나 전쟁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아쉬운건 현장 사진자료를 돈이 들더라도 칼러로 좀 뽑았으면 하는 것이다.
<신정일의 우리땅 걷기,갑오동학농민혁명답사기,푸른영토>라는 책이 잘되어있다.
여담으로 동학이 본격 세상에 나온 건 김지하가 본인 증조부가 동학과 관련하여 돌아가셔 흔적찾기에 몰입했으며 이를 김용옥에게 암시를 주고,역시 집안일로 관련이 있는 쿠데타 박이 동학혁명이라고 갖다 붙여 농민만 쏙 빼 농민의 계급성을 감추었다가,
(쿠데타 전은 완산 전씨,전봉준은 천안 전씨라는 주장이 있다.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16/2016051600426.html)
이승만은 해외유학파이지만 같은 전주이씨 먼 친척 이기붕을 끼고 돌았고, 쿠데파박과 쿠데타 전도 자기 업적과는 반대되는 인물인데 대대적인 지원을 한걸 보면 우리나라사람은 아직도 근원에 있어서 단절되지 못하고 있다 봐야겠다.
<녹두 전봉준 평전>시대의 창, 김삼웅, 2009
김상웅 샘의 화려한 지식을 망라하며 관련자료들을 총망라하여 좌우로 찔러 대며 서술한다.
뒤의 부록(공초, 판결문, 혁명일지,연보)도 훌륭하고, 색인 또한 보통 성의가 아니다.
위책과 같은 내용인데 와꾸가 꽉차게 기술하셨다.
두분의 성격차이나 이력을 책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주요내용을 소목차를 달아 찾기 쉽고 읽기 쉽게 서술하셨다.
많은 인용과 싯구가 가슴을 파고 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차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선 사람이여"
"나는 조국의 밝은 새벽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밝은 세상사람들은
밤사이 스러져간 사람들을
잊지 말아 달라"
"아, 그때부터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노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넘을 수 없는 너를 넘는다"
정약용의 경세유표(즉각적인 개혁을 촉구한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당시 금서인 이책이 동학농민지도부가 탐독하고 인용한 듯하여, 갑신정변과 갑오농민혁명이 같은 사상에서 다른 방식의 시대개혁을 추구한것이 아닌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갑신정변 주역들은 농민혁명을 기화로 10여년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정계로 복권되는 호기를 맞고, 전봉준은 일본과 개화파는 모두 똑같은 나의 적이라고 일갈하여 대척점에 있었지만
김옥균(1851년생)과 전봉준(1855년생)은 4살차로 같은 세대이고, 원래 출발한 사상적 뿌리는 같아 질수 있고 자신이 처한 신분에 맞게 (엘리트 정치인-농민) 다른 개혁방안을 추구한 것은 아닌지.....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일본군의 정보망과 각개격파로 북쪽과 동쪽 동학군이 모두 차단되고 주력이 호남군만 토끼 몰이식으로 섬멸된점
전봉준장군이 북접과 남접의 공동연합전선에 너무 시간을 지체한점
우금치전투도 당시 주력이 농민인 탓에 농사일이 겹쳐 겨울에 출병해 패퇴했는데, 봄에 출병했으면 숫적우세로 승리하지 않았을까 아쉬워 한다...
키작은 영웅을 이야기할때 우리는 흔히 나폴레옹을 이야기하는데 , (그는 사실 작은 키가 아니었다) 우리도 일상에서 다감다정하고 인간미를 보이며 때로는 단호하게 천둥벼락 처럼 일어나던 그를 인용하였으면 좋겠다...
전봉준과 김옥균을 비교한 책을 이후 읽다.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이다.
갑신정변을 개발독재세력이 남과 북에서 같이 숭상한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역사 최전선>에 잘 나와있다.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gJZ7Q4rvvNEqozFVaLCT2rG-9eg_ntbUtShSCv_eq4QDHoUrBtaFuEl9hZAqArzXoR8bZO8g6UkGwMvc3KbBpUuaHRMmWxLFpbTDr8WfRZ3n8LwgB-GPXU3xwpPV0yTOfDUNcHGw/s400/IMG_6324.JPG)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h_BHPsoWwP8Bc4xhhitOkGGY26RUEoJ8LoGMM9dnbCBkNLzwlMpFMEgMQchHf9T21K3NygNduTIwu_Ph8VuqxIjYF-o1t25QrrqzGNPFsOPVHLXsHIdZtPGoyt3RWFkAMgMwnakw/s640/IMG_0568.JPG)
농민군을 학살할때 악용된 우지개
서울 종로에 전봉준 동상을 사형장소인 영풍문고앞에 건립예정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86277.html
종로에 선 전봉준 동상
http://dankunjosun.blogspot.kr/2018/04/blog-post_29.html
최근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2>를 읽다가 <폐정개정안12개조>가 당시 동학군이 제기된 것이 아닌 1930년대 오지영이 쓴 <동학사>라는 글에서 인용한 것인데 오지영이란 인물이 동학교도로 최시형과 혼인관계로 얽혀있고 전봉준 측근이었던 점, 그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천도교주를 데리고 집단으로 만주로 이주하여 실험적인 농장을 경영한 경력을 들어 "토지개혁안"이 그의 창작이었다는 글을 읽고 혼란에 빠졌다. (노용필<동학사와 집강소 연구>국학자료원,2001)
당시 동학지도부가 서구문물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더욱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까지도,,
물론 실학자들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으나 최초등장사료가 오지영의 <동학사>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국사시간에 과부 재가 얘기했다가 호통을 들어가며 토지개혁 등등 달달외운 것이 허구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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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때부터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노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넘을 수 없는 너를 넘는다"
정약용의 경세유표(즉각적인 개혁을 촉구한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당시 금서인 이책이 동학농민지도부가 탐독하고 인용한 듯하여, 갑신정변과 갑오농민혁명이 같은 사상에서 다른 방식의 시대개혁을 추구한것이 아닌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갑신정변 주역들은 농민혁명을 기화로 10여년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정계로 복권되는 호기를 맞고, 전봉준은 일본과 개화파는 모두 똑같은 나의 적이라고 일갈하여 대척점에 있었지만
김옥균(1851년생)과 전봉준(1855년생)은 4살차로 같은 세대이고, 원래 출발한 사상적 뿌리는 같아 질수 있고 자신이 처한 신분에 맞게 (엘리트 정치인-농민) 다른 개혁방안을 추구한 것은 아닌지.....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일본군의 정보망과 각개격파로 북쪽과 동쪽 동학군이 모두 차단되고 주력이 호남군만 토끼 몰이식으로 섬멸된점
전봉준장군이 북접과 남접의 공동연합전선에 너무 시간을 지체한점
우금치전투도 당시 주력이 농민인 탓에 농사일이 겹쳐 겨울에 출병해 패퇴했는데, 봄에 출병했으면 숫적우세로 승리하지 않았을까 아쉬워 한다...
키작은 영웅을 이야기할때 우리는 흔히 나폴레옹을 이야기하는데 , (그는 사실 작은 키가 아니었다) 우리도 일상에서 다감다정하고 인간미를 보이며 때로는 단호하게 천둥벼락 처럼 일어나던 그를 인용하였으면 좋겠다...
전봉준과 김옥균을 비교한 책을 이후 읽다.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이다.
갑신정변을 개발독재세력이 남과 북에서 같이 숭상한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역사 최전선>에 잘 나와있다.
2015년 12월 5일 서울시청앞 2차 민중총궐기
2016년 가을 남원 광한루에 갔다가..
농민군을 학살할때 악용된 우지개
서울 종로에 전봉준 동상을 사형장소인 영풍문고앞에 건립예정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86277.html
종로에 선 전봉준 동상
http://dankunjosun.blogspot.kr/2018/04/blog-post_29.html
최근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2>를 읽다가 <폐정개정안12개조>가 당시 동학군이 제기된 것이 아닌 1930년대 오지영이 쓴 <동학사>라는 글에서 인용한 것인데 오지영이란 인물이 동학교도로 최시형과 혼인관계로 얽혀있고 전봉준 측근이었던 점, 그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천도교주를 데리고 집단으로 만주로 이주하여 실험적인 농장을 경영한 경력을 들어 "토지개혁안"이 그의 창작이었다는 글을 읽고 혼란에 빠졌다. (노용필<동학사와 집강소 연구>국학자료원,2001)
당시 동학지도부가 서구문물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더욱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까지도,,
물론 실학자들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으나 최초등장사료가 오지영의 <동학사>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국사시간에 과부 재가 얘기했다가 호통을 들어가며 토지개혁 등등 달달외운 것이 허구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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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샘의 <동경대전>을 읽고
동학농민혁명은 실패가 아닌 혁명의 시작,
3세기 300년 후를 내다본 일이다는 주장을 읽고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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