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이라는 이름은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읽을 때 늘 나오는 이름인데 딱히 정리된 자료를 본 적은 없다.
아마도 해방 이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뒤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에게 숙청당해서 그런 듯하다.
저자 안문석은 65년 생으로 관악 종합대 철학과를 나와 영국에서 석박사를 받고, KBS 기자를 거쳐 전북대 교수를 하시고 계신다. 무정에 대해 책을 쓴 계기가 하숙방 선배가 잠자리에서 언급한 계기로 무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지나고 보면 사소한 계기가 자신의 긴 인생의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 읽은 강준식 <적과 동지/한길사>를 보면 해방 이후 정치적 동아줄 잡은 줄이 썩은 동아줄인 경우로 그들의 정치 인생도 끝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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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이라는 독립운동 경력, 인물도 대중적 지지도나 인기 외에 무관 출신의 딱딱한 성격과 무장 투쟁 독립운동가가 흔히 보인 직선적 사고가 해방 이후 소용돌이 속에서 불리하게 작용한 듯하다.
일본 | | 여운형 |
중국 | 장개석 | 김구 |
팔로군 | 김두봉 |
공산당? | 무정? |
미국 | 육군 | 이승만 |
국무성 | 김규식 |
소련 | 군부 | 김일성 |
외무성 | 박헌영 |
본명은 김병희, 1904년생, 3.1운동에 가담했다. 1922년 강경 학생운동 영향으로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했다. 1921년 중앙고보, 보성전문 등 7개 교장단이 전문학교 이상만 학생운동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결의를 하였다. 별걸 다했네 1926년은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3년 조선 노동대회에 참가하였다. 대부분의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은 국사에서 안 가르쳐 생소하다.
1924년 중국 군사학교에서 실전에 참여한 무정이 워낙 뛰어나 상관이 무정이라고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중국공산당의 대장정 참여한 한국인 중 유일한 생존자 두 명 중 하나다. 포병장교였는데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팔로군 내에서 간부로 승승장구한 것으로 미루어 리더쉽도 뛰어났다고 추정된다.
저우언라이, 주더 등과 친분이 있었다. 님 웨일스의 < 아리랑>에 김산과 언급되지만 서로 알고는 있어도 교류는 없었던 듯하다.
중국인 여인과 결혼했다가 이혼 후 한국 여인과 재혼하면서 이후 밉보여 중국공산당에게 소극적 지원만 받은 듯하다.
해방 이후 소련의 방해로 무장 해제되어 개별 입국하였다. 소위 연안파는 교육 수준이 높았고 조선의용군 출신이 많았다. 하지만 김두봉 등 노선투쟁이 심해 만주에서 생존형 독립운동 몰두했던 김일성, 김책 등 만주파에 비해 연대가 약했다. 조선의용군을 이끌었다.
무정은 마오쩌둥 사상학습을 한 경험으로 정치노선은 반스탈린, 반소련, 반김일성이었다. 무정은 무인답게 호방하였으나 고압적인 분위기가 있어 정치인으로 마이너스였다.
무정의 항앵무장투쟁 경력은 김일성의 제1 경계 대상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조선의용군 출신 5~6만 명은 팔로군 출신 규율이 강해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인천상륙작전 후 후퇴하는 과정에서 퇴각하는 장성을 즉결 처분하여 숙청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무정은 숙청 당시 숲속 오두막에 갇혀 참전한 중국군이나 연안파의 지원을 못 받아 체념하였다. 대장정 이후 생긴 위장병이 숙청 이후 위암으로 발전해 중장 제복을 입고 위암 수술 도중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