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기사를 접하고 기다리다가 전시공개를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고 찾아갔다.
4월기사👉http://www.culturelamp.kr/news/articleView.html?idxno=354
경향신문 기사가 심도있고 디지털데일리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5160900001
👉http://www.ddaily.co.kr/page/view/2023051702381310997
5월16일 화요일 서울공예박물관과 같이 전시했는데 늦게 알아 그냥 집에 오고 지나며 왔는데 걸어갔으면 아마도 구찌 패션쇼 때문에 경복궁 통과를 못 했을 듯 한다.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gjF4J22LjfYEwxbbrUkNoPlrZuQkbx2G5gOXe0Rb_ciZEFX3KVbT1OzYdiWokF2AO-pIpIXwACuGQsvFAnwi8iHFV5lyZ7C4hN6HT7c-ipIydaGxjTlKKlC2dcSQAZlqlOaV_9wMTkh4nn-ftiUwTGLJf8s1G61taePW0ukpTM7u7_H0y-Lg/w480-h640/IMG_1460.HEIC)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hy29uZOIf_K20SSoxmANf0h9fQcy4lFJX-23VgC_lxNBrNut77xSJKPFFpQ36_BZkZ7yqY_GyVz4_VtpMrEmeFQx3mOT4w-fWv0arqjelz6EWIq3pUWNuIV3JUVy0P4GS055x9e-KB-xD-KktpEbOwXlL64b9wi3G9UxiUDiFa5aFUmp4I0w/w640-h480/IMG_1483.HEIC)
크기도 어마어마 하지만, 개성이 한양보다 더 크게 나와 서글픈 분단의 현실을 느낀다.
북한의 동해와 서해의 여러 섬도 상세히 나와 눈여겨 보다.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jaxANT4YE16I1uo0kYmxA0xPp5YTsT01NNN1P4uptCSxPKr23hllDU6ObHwAkmMuKyq-OVHNv2lCwr_A7TWy6sgdSTUO0b61tLvhfb1An1ZUbvGhQcb74zKkhUctaSFNIGlx2wPWdQIRIKbiEPp7cm6M9kQL3nMpcEUFmMyqAOMJ1XJDRsxA/w640-h480/IMG_1473.jpg)
작년에 우연히 인사동 무우수아카데미에서
이기봉 박사님 강의를 듣게 되어 같이 적기로 한다.
김정호가 살던 시대 조선 양반들은 지방에 칩거했고 상업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건너편 일본은 에도시대에 엄청난 상업 발달이 이루어진 것과 대비된다.
김정호가 그린 지도은 6.6m 정도 되는데
지금은 전시 기술이 발달하여 가끔 전시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조선이 다 뒤처진 것은 아니고
경국대전 같은
국가조직 시시템은
조선이 월등히 일본보다
잘 정비되어 있었다.
김정호의 지도를 보고 후세사람들이 추측하길
적국에 군사기밀을 유출할 우려가 있어 문초를 받았다는 둥
2009년 소설 <고산자>와
이를 바탕으로 한 2016년 영화<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는
홍경래의 난과 관련해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로 했다는 동기 등이
나오는데 다 맞지 않는다.
김정호의 책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보다 2권이 더 있고
앞으로 계속 나올 것이다.
특이한 것은 미완성작품이 있다는 것인데
김정호는 퇴직 이후를 걱정하지 않고
끝까지 현역으로 살다 죽었다.
공무로 신경준이 1770년 6m 크기 지도를 제작했고 금박으로 만들었다.
공무원인 화공이 그걸 그려서
위작이 민간에 유통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정상기가 1740년대 만들었고
복사본이 많이 있었다.
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할 당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1463년 지도에는 북측 정보가 없었다.
4군 6진에 정착하고 주민을 양성하려고 했다.
대동여지도는 군사지도일까?
이전의 지도에도 늘 표기되었고,
당시 관리가 되려는 지식인은
누구나 알아야 할 필수 교양 수준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수집해 규장각에 두었다.
역사는 무궁무진한 신화가 있어
김정호를 보는 애국자 신화가 특이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시각을 달리해서 보아야 한다.
지도 분야에서 전국 답사 후
경위도를 측정해 <일본여지전도>를 만든
이노 다다타가(1745~1818)를
조선에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이에 대한 반박으로
1925년 10월<동아일보>에 김정호 신화가 시작되었다.
이전부터 위도 측정, 삼각측량을 할 수 있는
천문학적, 수학적 지식은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은 지역은
고대로부터 전래한 지식 축적을 하고 있었지만
수요도 없었고
그래서 개발도 하지 않았다.
90년대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지도 없이 길을 나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길잡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코폴로는 지도를 보고 여행하지 않았다.
고조선-고구려-신라-조선 길은 같다.
수요가 많아지니 지도 제작을 시작했다.
경주 지도나 전주 지도는 없는데
서울 한양 지도(수선전도)나 전국 지도는 많다.
수요가 많으니 공급도 많아 진다.
김정호는 오늘날 출판사 사장으로 볼 수 있다.
김정호는 초창기 목판을 파는 "각수"였다.
당시에는 최하층 계급이었다.
딱히 족보에도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평민이었다.
혼란기에 신분제가 재편된다.
신숭겸이나 왕건은 호족인데
신라 후기 혼란기에 중앙에 올라 간다.
고려시대 사대부는 무지랭이었다.
영, 정조 시대에는
김정호 같은 인물이 출현하지 않는다.
김정호가 살았던 18세기 혼란기를 다시 봐야 한다.
신경준이 쓴 책을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신경준이 알았던 잘라서 책 만들기 시도
300매가 되는 책을 찾아보기(색인)를 추가하여
찾아보기 쉬운 <청구도> 완성
접어서 보는 이어보기 지도는 편리하지만, 영역표시나 축적, 찾아보기가 안된다.
피나무 목판으로 김정호급 정도의 전문가는 3~5달이면 판다.
미완성작이 있다는 것은
꿈을 가진 자의 특권이다.
김정호는 자존심이 강해 후원을 받지 않았고 친구인 최한기의 부탁으로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를 만들었지만, 당시 수요가 없어 잘 팔리지 않았다.
항상 신제품개발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
전문출판인, 경영인, 진정한 학자였다.
한문도 독학으로 깨우침
질문>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없기 때문에
한일합방 이후 독도를 일본이 찾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당시 한양 지도는 많은 데 전주나 경주 지도는 없다.
당시 일반 조선인들 사이에 독도는 관심외 사항이었다.
대중적인 출판업자인 김정호는
이에 따라 표시하지 않았다.
(개인 생각 👉아편전쟁 당시의 홍콩과
지금의 홍콩을 같이 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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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연이 되어 <서울역사박물관>에
지구전후도 전시를 요청하는 이벤트에 당첨되어
경품도 받고 마.침.내 지구전후도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