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문경출생으로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1882년 임오군란1884년 갑신정변등으로 정국이 혼라한 와중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시고 후일을 기약하시다.
동학봉기에 참가했다가 이후 의병활동을 하시다
제천전투에서 500여 적을 섬멸하시다.
제천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장마철이라 화승총을 쓸수 없어 고전하던차에 복사뼈에 총탄을 맞고 사로 잡히시다.재판에 회부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시다.
(일본검사杉村逸樓삼나무 마을의 편안한 다락?와 일본판사 모리시마森島彌四郞가 내란죄로 교수형 내림)
군인이 전장에서 죽지 못하고 부상으로 체포되어 수모를 당한갓을 개탄하는 시를 남기셨다.
무관출신이면서 동학군,의병활동 등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보병전법님 속오작대도를 완성하다.
나름대로 의병군이 일제와 싸워 승리한 데에는 이분의 군사전략과 군율,교련등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당시부터 전면전이 아닌 산전山戰에서 매복,복병을 위주로 전투훈련을 받지 않은 의병을 게릴라 전투로 위주로 대항한것-설복비계(設伏秘計)-이 이후 중국공산당과 베트남전에서 호치민군이 활용한 전략의 효시가 되었다는 견해의 실제사례가 아닐까 싶다.
여러 언변과 관련한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학문이 깊고 뛰어나신 분이 틀림없다.
(이순신장군도 문무에 출중하셨다...조선의 무관교육의 단면을 봄)
고위장교출신임에도 동학군,의병활동 등 대의를 위해 민중과 함께한 그의 심성이 대단하시다.
후손들은 재산을 강탈당하였다.
아마도 이곳이 까치성 전투와 관련있는 곳인 듯하다.
추모비옆 고양이,건너편 원뜰식당이 약초음식으로 꾸려주시는 데 맛나고 신묘하다.가지축출물을 후식으로 주시는데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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