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04, 2016

히스토리 채널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 History Channel Documentary

알렉산더이야기가 지금까지 전승된 계기는 그의 사후 몇백년후 4명의 학자가 당시 주변인의 일기나 편지등의 자료를 정리하며 알려지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母 올림피아스는 필립2세(26세)와 결혼후 거시기에 벼락이 떨어지는 꿈을 꾸게 되며 뱀과 동침하며 신과의 관계(제우스신이 뱀의 모습으로 인간세계에 내려왔다고 믿게된다.)라든가 신비적인 종교에 심취하게 된다.

전장에서 일생을 보내며 가장 현실적인 판단을 하던  알렉산더 아버지 필립2세는 이때부터 그의 아내와 불통하였듯하다.



출생에 대해 이러한 경험을 한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알렉산더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자신이 제우스신의 아들인지 인간의 아들인지 고민한듯하다.

호머의 시집을 탐독하며 야심만만하게 아버지로부터 로열패밀리 교육을 받던 알렉산더는 그의 애마 부세팔로스를 취하는 그림자 일화로 영민한 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대 최고 엘리트였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한 필립2세는  알렉산더에게  사실적이고 억측을 금지하는 교육을 받도록 배려하였다.

알렉산더가 동성애적 성장과정을 보이자 고급매춘부를 동원해 성에 눈뜨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술고래였던 그는 해피션이라는 동급동성에 더 끌렸고했고 평생동지로 성장한다.
(이는 이당시 잦은 전쟁으로 인한 동지애였던 듯하다.)

과음은 해도 여자에 관심이 없던 그는 더 많은 살상을 위해 밤샘 전략을 연구했다.
(대체로 술을 먹으면 여자가 땡기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실적 과학적 교육/아버지로부터 군사,정치/어머니로 부터 신화,종교를 배운 알렉산더는 당시 또래 아이중 두각을 나타낼수 밖에 없게 되었다.

자신의 마케도니아왕국을  한수 아래의 미개인으로 취급하던 그리스 정벌에 아버지와 동행하며 그의 군사적 교육이 실전경험을 통해 잠재력을 터뜨리게 된다.

필립2세는 방진전법으로 5m의 긴창으로 전진하는 신기술로 육전을 휩쓸기 시작한다.

마케도니아는 테베(신성神性을 가진 동성애부대),아테네(페르시아의 지원) 연합국과 교전한다.



케로니아전투에서(이후 가우가멜라 전투에 똑같이 응용한다) 18세로 기병대를 지휘한 알렉산더는 혁혁한 공을 세우나 아버지의 경계심으로 추방당한다...

그는 테베군을 전멸시킨다.

에피루스 출신으로 로열패밀리가 아니었던 어머니는 늘 주변인으로 피해의식을 갖고 불안해 하여 알렉산더가 왕위승계를 하여 신분이 안정을 되기를 염원하였다.

한편 델포이신전을 겨울에 찾아 신탁을 거부하는

여사제를 족쳐서

"누구도 널 정복할 수 없다"는 신탁을 받은 알렉산더는 익히 읽던 호머의 아킬레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현상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개 거만 오만불손 남의 말 씹는 태도가 되었다.)

그는 대담하였고 쪽팔린걸 싫어했으면 정정당당한 정면승부를 즐겼다.
혼자 투구에 긴깃털을 꽂아 적에게 신분이 노출되는 위험을 자초했다.

그는 그리스신화의 여러신에 제물을 바쳐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민심수습을 했다.

그는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3세를 격퇴한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용병 4만을 투입했지만 소득이 없었다.이번에도 주변 베테랑 장군의 포위될 위협이 있다는 조언을 씹고서 정면승부를 해 적을 궤멸 시킨다.

그는 두려움 자체가 없었다.(그의 내적 확신;알렉산더=제우스 아들=신)

다리우스3세 가족을 인질로 잡았지만 극진한 대접을 하며 여론수습도 하고 언플도 하며
 페르시아를 정복할 계획을 한다.

도주한 다리우스3세를 기다리는 동안 티루스섬을 정벌한다.

티루스섬은 섬전체가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고 성곽으로 둘러쌓여 난공불락이었으나
섬내 헤라클레스신전 참배를 빌미로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 당하자(티루수섬에서는 알렉산더의 특사를 바다에 던져버림)



빡이돌아 방파제를 쌓아 육지에서 섬으로 접근하여 정복



당시 기름병화살을 이용했는데 요즘의 네이팜탄의 시초다.



섬을 점령한 후 헤라클레스 신전에 제사지내고 항복하지 앟은 1만명모두 학살 3만명 노예처리

방파제와 도로를 이용한 전투방식이 당시 아시아전역에 빅뉴스로 전달됨

티루스섬을 정복한 알렉산더군의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그는 주변 도시를 점령하고

이집트의 아몬신전으로 여행을 하며 종교적 체험을 한다.

식수가 부족할때 비가 오고,모래언덕에서 길을 잃었을때 까마귀가 길을 안내하는등 자기 합리화과정 거침

이집트 아몬신전은 제우스신전으로 그곳에서 자신이 세계를 정복할 것이고 자신의 아버지가 제우스이며 자신의 필립2세의 암살과 무관하다는 신탁을 들으며 자칭 神의 경지를 경험함(왕위 찬탈을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혐의에 책임감을 덜어냄)

가우가멜라 전투시 정정당당한 전투를 선호한것은 이수스전투에서의 승리가 요행으로 비춰져 재반격을 빌미를 주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수스전투시 좁은 산길을 이용한 것을 변경해 대평원에서 싸움

야행성으로 밤늦게 까지 전략연구후 내낮까지 쳐자

승리후 병사드의 약탈을 4개월동안 장려했으며 폭음으로 술자리여자의 꼬임으로 페르시아 왕궁을 즉석에서 불살라 버리기 까지함
(자신의 목표의식이 부재되기 시작함)

도피중이던 다리우스3세는 은신처가 탄로나 알렉산더가 추격해 오자 신이 대신 복수해줄것이라고 여유를 부린다. 도주할 것을 강권하던 베수스 병사는 아직도 현실파악을 못했다며 창으로 다리우스3세를 죽인다.




알렉산더는 살해혐의가 있는 베수스인들을 처벌한다.하지만 다리우스3세는 성대한 장례를 치뤄준다.

알렉산더군내부에 이상기류가 흐르는데
자신의 장군층은 필립2세의 충복으로 이전왕의 스타일이나 이상을 따르던 무리라
새로운 왕인 알렉산더와 노선차이를 보인다.

당시 포로였던 록산르와 로맨틱한 감정이 생겨 갑작스레 결혼한다.

꽤락에 빠진 알렉산더는 자신이 곧 神이라는 믿음으로 페르시아복장을 즐겼으며 365명의 후궁을 두고 진탕 놀기 시작했으며, 페르시아관습을 강요하자 이에 거부감을 느낀
본국 그리스신하들은 반발하며 자신을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을 처형한다.
(그는 군인이지 정치가로는 미숙했다)

인도에서 코끼리부대와 교전하며 한차례 고전을 겪은 알렉산더부대는 말리안부족과 전투를 한다.(기원전 323)

말리안 부족은 만리시라는 성벽으로 방어하며 예언가를 보내 알렉산더가 치명적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부정탄다고 일갈한다.

혼자 사다리를 타고 요새안으로 선두진격하던 그는 후발대부재로 치명적 화살공격을 당한다.

말리안전투에서 화살대를 톱으로 자르고 갑옷을 벗겨 늑골사이에서 촉을 뽑은 위험천만한 상황에 몰리자 그는 기절하기에 이른다.





2년여동안 육로와 해로 이동중 전우인 해피션이 죽자 대성통곡하며 주치의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한다.(의료사고 책임?)

당대 도시나 세계는 모두 알렉산더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는 인간이기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었다.

유언으로 "가장강한자에게 줄것이라는 말"은 죽기전 열병으로 아무말 못했을 것이라는 이견도 존재한다.

열병사망설,말라리아,알콜중독,독살,자살 많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문이 생겼다.

그는 정복가였지 유능한 행정가는 아니었고 그의 죽음연대도 B.C.323?321?20? 각기 다르다.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권위를 이용하기 위해 시신을 차지하려했고 고향 마케도니아가 아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아몬신전 어딘가에 묻혔다.

이후 로마시대까지 수천명이 그의 석관무덤을 보았으나  클레오파트라가 패하며 그의 포톨레 마이아스왕조가 멸망하니 이후 행적묘연


그의 사후 그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한동안 그의 왕관이나 옷을 테이블에 놓고 군지휘관회의를 주재하였다 한다.


지하터널 물이 흐르는 어딘가에 아직도 존재할 듯

그는 보병 ,기병 4만 군사로 32000km이동하며

12년간 전쟁을 통해 당시 세계를 정복했다.
(보통 12년이면 일반인이 뭘할수 있을까?)

그의 사후 20여명의 통치자가 분할 통치를 하였다.

그는 단 한순간도 두려움을 가져본적이 없었다.
자신의 신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제우스 아들=신)

(이건 징기스칸의 부대가 세계를 휩쓸고 다니며 많은 학살을 하면서도 세계정복이 자신에게 부여된 신의 과업이며, 자신들은 과업을 수행하는 신의 군대라고 확신한 것과 비슷하다.
당시의 칸은 교황의 대사에게 너희가 믿는 신이 곧 자신이라고 천명하였다.)

알렉산더는 동서문화를 융합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민족적 우월감에 빠져 외국인=노예)가 가르친대로 외국인을 야만인 취급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파격을 보였다.(스승을 뛰어넘는 코즈모폴리타니즘,세계동포주의를 보여주었다.)  아마도 시골학자와 세계정복군주의 스케일의 차이였으리라...

하지만 제국을 건설하는동안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미치광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당시 한반도는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가 고조선과 전쟁을 할때이다.(기원전 3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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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이누가미 일족 (1976) > -옛날 영화인데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의 홍보 메일을 받아 확인해 보니 재팬파운데이션 무비페스티벌을 상암동 영상자료원에서 하고 있었다. 👉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578 예약을 못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