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내가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글귀에 집착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생 때 당시 대학생이던 형의 책중 <찢겨진 산하>를 읽으면서인 듯하다. 친구들과 시국 얘기를 할 때 겉멋 들어 보이려고 이것저것 대자보 이야기며 대학생 혀들의 이야기를 자기주장처럼 영웅담처럼 하던 때였다.
당시 6.29 선언 직전 6.10 항쟁의 분위기에 기말고사를 준비하며 연세대 앞 텅 빈 거리를 터덜터널 걸어 오던 일이 많던 때였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을 몰래 읽고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고 계엄군이 창검으로 지하도에 쭉 서있는 잔상이 지금도 연세대 앞 지하도를 걸을 때는 떠오르곤 했었다.
그러다 아마도 대학에 들어가 신동엽 시인의 <금강>을 읽으며, 교양수업으로 한국사를 들으며 교수님께 질문을 통해 동학이 과거완료가 아닌 현대사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이후 김지하의 <사상기행>책을 읽다가 다시 동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거기서 김일부의 정역이나 증산도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데 아마도 도올샘이 <정역>에 대한 책도 곧 내실 듯하여 그때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런 일련의 역사 흐름이 결국은 1894년 농민 봉기의 연장선상이고 이제 1세기반이 지나고 있다. 3세기가 지나면 완성될 것이라는 예언을 도올 김용옥샘은 주장하신다.
최제우 선생은 시호 時乎하며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칼노래(검결)를 부르며 칼(혁명)춤을 추던 그 첫 호흡에서 300년 후를 내다보았을까? 아마도 최진립 장군의 7대손으로 무예에 통달한 최제우는 무예보도통지나 관련 무예 서적을 탐독했을 듯하고("검결"이란 용어 차용에 대한 개인 생각) 장사를 위해 전국을 떠돌며 아마도 남대문시장에서 김정호나 최한기를 지나치지 않았을까? 작가는 상상한다. 또한 퇴계 이황의 학풍을 계승한 근암 최호의 아들로 수운 최제우 선생은 당시 문무를 통달한 인물로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읽다가 놀란 것은 도올샘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경대전> 원본을 검토하시면서 지도고문헌 전문가 이기봉샘과 조우한 기록이다. 이기봉샘이 도올서원 1림 출신이라고 한다. 이기봉샘은 개인적으로 인사동 무우수아카데미에서 강의도 들은 바있어 기억이 난다.👉https://dankunjosun.blogspot.com/2023/05/blog-post_20.html
그 뒤로 최제우 선생의 자취를 찾아 돌아다닌 적도 있고 종로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찾아 구경하다. 동덕여대의 "동덕 同德"이 천도교의 형제님 자매님 같은 용어라는 것을 처음 천도교 관계자에게 들었다. 3.1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 기금모금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한 일화도 설명해 주셨다.
☝전주 동학혁명기념관
☝경주 용담정, 대부분의 기도터가 물이 흐른다. 겨울에는 춥지 않고 식량(?)을 대체할 것이 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제우 선생님도 이 물을 마시지 않았을까?
수운은 용담의 물과 구름이며 사해 四海에 동학을 포교하라는 뜻으로 해월海月(바다에 뜬 달)이라고 호를 지어주셨다. 이 글을 읽으며 큰 바다에 파도 소리를 안고 덩실 뜬 달이 떠올랐다.
☝국립중앙박물관 실감콘텐츠 "금강산에 오르다"절명에 이른 최제우 선생이 남긴 시구 또한 미래를 내다본 종교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물위에 가득 등불이 밝았으니
도무지 어두운 틈이 조금도 없다.
물위에 진 집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말라 비틀어진 것처럼 보여도
만세무궁한 힘이 남아 있다."
해월샘은 동경대전을 활자화하여 스승의 뜻을 세상에 전하고 35년의 수배생활(도바리꾼)을 통해 동학교도를 전국에 넘쳐나게 하셨다. 아마도 1차 동학 봉기에 소극적인 해월이 2차 동학봉기에는 "천명"이라고 말하며 거사를 일으킨 것은 이필제가 주도한 영해부교조신원운동(1871)때문이 아닌가 싶다.
☝체포된 뒤 서소문감옥에서 지금 종각역 1번 출구 제일은행본점에 있는 고등재판소에 재판을 받으러 다니며 목에 쓴 칼의 무게에 모전교에 쓰러져 쉬어야 했다. <보국안민 발길로 서울을 걷다/이동초/모시는사람들/2017>
1894년 동학농민혁명 혁명의 시작, 당시 소년 접주 중 김구 선생이 계셨다.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있었는데 당시 안 의사는 동학에 대한 신분적 관점에서 난으로 부정적으로 보셨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 의사는 서양 신부들의 인종적 차별에 분노하여 거사를 일으킨다.
김개남의 죽음에 관여한 의병장 임병찬 역시 신분제의 편견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안중근과 임병찬을 보며 종교개혁을 주장한 루터가 농민반란에 극대노하여 농민진압을 주장한 모습이 겹쳐보인다.
☝남원 광한루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1911년 보성전문, 동덕학원 천도교 인수 민족교육 매진, 인재 양성
1919년 3.1 운동 (천도교 주도)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ijsOYxIcZPQnsJGHOGBaeKIdgXsfenvD37kViRZ3Vnc5Apun88fq0MI1WhfXTBMiyuxX7pHXHBYoUbsEt_M65x6hxkwWUsZKiXL3jssb8lIHmHGf-TiGAWPpfPtpJTF6BBFzq7UNj_RB74CptrxTcNf5WLbSC8eX0xskC4FHQuLFQfWBPaOsBt/w480-h640/IMG_8138.jpg)
동학군은 이쪽으로 전주성로 진입한다.
뒤에 전주 신흥고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아마도 동학군은 이 남천을 따라 전주성으로 진입하지 않았을까?
☝ 종각에 있는 전봉준 동상,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실패가 아니다.
그건 바로 혁명의 시작이고
300년 후에 완성될 것이다.
2권 맨뒤의 동학연표(1779~2021)은 어는 연표보다 정성과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다. 백범일지를 포함 일본군(500m)과 동학군의 화승총(50m) 비거리가 10배라는 등 여러 자료를 집대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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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남태령에서 농민시위대가 트랙터를 몰고 넘을 때 이곳이 바로 우금치라고 주장하는 트위터 글을 읽고 다시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