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떠나는 서산여행 2025-647년만에 고향을 찾은 서산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좌상 친견후기
5월 황금연휴가 돌아 왔다.
인스타그램에서 647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고려금동관세음보살좌상에 대한 글을 보고 서산 부석사를 처음 가보았다. 연휴에 5월 5일은 부처님오신날이고 4일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인파가 적으리라 생각해 내려갔다.
서산 부석사? 영주 부석사는 들어 봤는데 의상대사의 전설이 있는 돌이 뜬다는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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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리아에서 쥐포를 파나? 롯데이츠 어플로 보니 신제품이다. |
👆비도 오고 사거리에 신호등이나 교통통제하는 분도 안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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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지도에서는 여기서 타라는데 나중에 안 것은 버스출발지가 서산공용버스터미널이라 거기서 기다리면 비도 안맞고 편하고 택시타기도 편했을 것이다. 선풍기👀??? |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이야기는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는다.
👆택시기사님께서 유명한 곳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절에 도착해서야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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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가 적혀있다. 영주 부석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도비산(도島비飛 "섬이 난다") 자락에 있는 서산 부석사는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뭔가 지역주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
곧 대마도 간논지(관음사)로 가신다고 한다. 기사와 여러 검색을 통해 간략히 사유를 적어보고자 한다.
간논지의 주지가 1951년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의 복장유물이 발견하였는데, 내용은 1330년 2월에 고려 부석사에서 제작하였다는 결연문이 나왔으나 어딜봐도 일본에 이전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므로 1378년쯤 왜구가 서산을 약탈할 때 훌쳐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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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부석사에서 제공한 유인물에 밝힌 금동관세음보살의 복장유물과 결연문 내용
비가 와서 끝이 훼손되었지만 국응달, 난보, 소화이, 국악삼, 반이삼, 내화팔, 악삼 등 지금은 쓰지 않는 1330년 당시 고려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고 결연문의 전내용이나 복장 유물을 소개한 거의 유일한(?) 자료다. |
아마도 왜구 수장이 보기에도 보통 부처님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러니깐 훔쳐갔지 집에 보관하다 그 종손이 간논지에 기증한 듯하다.
2012년 그 불상을 절도범이 대마도에서 절도해 한국에 가지고 옴으로써 간논지와 부석사의 소유권분쟁이 터지고 한일 외교 문제화 되면서 정부의 외교정책에 따라 판례도 춤을 추기 시작하여 최종 판단은 2023년 대법원에서 (로그기록이 뭔지 모르시는 분들께서) 일본 간논지에 소유권이 있다고 판단하여 2025년 5월 일본으로 가신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21 기사로 대체한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4615.html?_ga=2.88677788.64907058.1699598827-1459627471.1694678877
과거 역사 기록이나 판례 내용을 읽어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많지만 생략하고 우선 내가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어디서 봤는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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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박물관, 관세음보살상, 고려 13세기 전주박물관은 도심 외곽에 있는데 안타깝게도 방문객이 별로 없으니 어르신 쉼터가 되어 조용한 관람이 불가능하다. |


👆머리 상투 모양이 원나라 양식이라고 한다. 1330년대에 고려의 외곽 서산에 이 정도 정교한 불상제조기술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놀랍다. 도톰한 얼굴, 자연스러운 손가락, 균형잡힌 신체비율, 장신구나 옷주름의 정교함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 |
더 놀라운 것은 한국에 온지 10년이 넘었지만 두 부처님에 대한 기사나 비교자료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어느 블로그에서 닮았다고 평했다.👉https://jeonjucastelblog.tistory.com/308
여몽연합군이 일본 침공 후 점령한 몇 개 섬에서 대대적인 살육이 일어났고 그 위령탑이 지금까지 있다고 한다. 만화 <앙골모아 원구 전투기>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려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략의 그 영향도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을 약탈해간 왜구는
여몽연합군의 침공으로 살해된 대마도 후손이었을 수도 있다.
불상을 보는 순간 생전 처음으로 압도감과 황홀감이 전신을 휘감았을 것이다.
일본에는 없는 저런 완벽한 불상을 보며
관세음보살이 살아서 눈 앞에 앉아 계신다는 착각이 들었을 것이다.
문득 듣기만 하던 돌아가신 조상님이 생각나지 않았을까?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조상님의 극락왕생을
저 관세음보살에게 빌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그럼 빌기만 해야지 왜 들고 가냐?
일본도 우리도 한쪽 이야기만 자기 유리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판결문을 보면 서주 부석사가 현재 서산 부석사인지
조선 태종 때 폐사된 것이 아닌지 논하는 내용이 있다.
만약 그 부석사가 지금 부석사이고 위치도 그대로 라면
천수만에서 쳐들어 온 왜구 집단은 부석사까지 쳐들어왔을 것이다.
택시기사님 설명으로는 현대 정주영 회장의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바다가 안보인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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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심이나 경로를 밝힌 글은 없었다.
이번 고려금동관세음보살좌상의 불교, 역사, 미술사적 가치나 내용 또한 전무하다.
단편적이고 베껴 쓰기뿐이다. 우리 국보 중 80%가 불교미술이지만 나는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선생님들은 자신의 학벌로 로그기록이 뭔지 모르면서 국민을 가르치려고 대드는 대법관들처럼 학생들을 호령하며 기독교 학교라 하나님만 강조했지 불교미술이 뭔지 관심도 없고 모르는 분들이었다.
챗지피티에 물어 보니 그나마 답을 해주었다. 서산 지역에 이정도 정교한 금동불상주조기술이 있었다는 것은 고려 불상주조기술의 지방화를 상징하며 당시 고려에 유행한 관세음보살신앙을 확인할 수 있다.
👆전국에 도둑놈이 넘친다. 대학 가면 연구비횡령, 군대 가면 운영비 횡령,
회사 가면 또또,,,그러면서 누가 법인카드 얼마를 더 썼다고 돌을 던지고 있다.
이번 서산 부석사 금동관세름보살좌상도 감히 말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받들고 모시기에 역량이 과한 것이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겠다. 어제 저녁 프로야구 경기내용은 관심이 있어도 바로 눈 앞에 있는 부처님의 진가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저렇게 보존해도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일본의 민간 역사학자의 수나 역량은 대단하며 문화재 보존 기술이나 역량 또한 우리가 따르지 못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가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을 때
부처님은 우리 곁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초행으로 서울에서 차 없이 서산 부석사에 가는 것은 힘든 여정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비는 오는 데 버스는 오지 않았다. 고속버스비보다 택시비가 2배는 더 드는 현실, 주변에 간월암이 있어 가볼까 했지만 주변경관을 검색하니 보고 느끼는 것보다 먹거리 위주의 주변 경관이 놀이동산을 연상케 해서 단념했다.
그렇게 나는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마음의 인사를 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날씨가 말게 개었다.
결국 일본으로 가셨다. 교도통신👉 https://www.47news.jp/125608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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